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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Mar 14. 2019

아기는 기저귀에 항의할 권리가 있다

당연한 것을 고마운 것으로 다시 생각하기



대학 시절, 과 후배가 모임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더러우면서 귀여운 이야기 해드릴까요?"



대체 어떤 이야기이기에 더러우면서 귀여울 수 있을까. 



이야기인즉슨 이랬다. 그녀는 봉사활동 중에 한 아기의 대변 처리를 하게 됐다. 옷을 벗긴 아기가 욕실 바닥에 서 있는 동안, 후배는 분주히 샤워 준비를 했다. 문제는 아기의 용변이 종료된 게 아니었다는 거다. 아기 엉덩이 사이에서 갈색 형체가 봉곳하게 삐져나왔다. 조금 있으면 욕실 바닥에 툭 떨어질 찰나, 후배는 다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얼른 두 손을 내밀었고, 그 위로 아기의 똥이 고이 떨어졌다. 아마도 갓 찐 고구마처럼 따끈했을 그것이. 이것이 더러우면서도 귀여운 이야기의 전말이었다.



스무 살이 갓 지난 그녀였다. 아기 똥을 그렇게 가까이 보고, 촉감과 온도살갗으로 느껴보는 경험은 이전에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함께 들은 이들도 모두 이십 대 초반이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더럽다고 경악하거나 비위 상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기 똥이란 너무 생경해서 신비스럽기까지 한 물질이었으니까.



이제 후배는 어엿한 두 아이 엄마 됐다. 그리고 나 또한 뒤늦게 엄마 무리에 합류했다. 더럽지만 귀여운 그 이야기는 미숙하고 풋풋한 시절의 전 남았다. 아기 똥의 출현 더는 신비롭지 않게 된 지금, 모두 알 것이다. 그때 아기 똥이 귀여웠던 게 아니었단 걸. 더러운 것조 색다른 경험으로 여기며 깔깔대던 젊은 대학생발랄함이 귀여웠다는 걸.






내 자식이라도 똥도 예쁘다거나 냄새 향기진 않았다. 매일 몇 차례씩 치러지는 대변 처리는 점점 '더럽고 따분한 이야기'가 되어갈 뿐이다.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를 빼고, 수온을 맞추고, 엉덩이를 씻기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다시 기저귀를 채우고, 바지를 입히는 일 수없이 반복됐다.



옷 입기가 싫은 아기는 기저귀를 거부할 때가 많았다. 아기가 벌거벗고 있을 땐 오줌이라도 쌀까 봐 늘 조마조마다.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이불이나 침대, 소파 위에서는 실수  했다. 엄마에게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려면 최소의 예의는 지켜줘야 한다는 걸 눈치챈 걸까. 하지만 침대 옆 구석이나 베란다 앞 바닥에서 축축한 물 웅덩이가 자주 발견다. 그때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기저귀 차랬지!"라 원망의 말을 혼잣말처럼 내뱉다.



책에서 보니, 중국 아기들은 전통적으로 기저귀를 채우지 않는다고 한다. 생식기가 너무 덥고 답답하지 않게, 숨을 쉴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아기에게 가랑이 사이가 세로로 갈라진 '카이탕쿠'라는 옷을 입혔다. 오줌이나 응가를 싸면 천을 갈아주고, 백일 무렵부터는 대야를 받쳐줬다. 일회용 기저귀 도입으로 대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으나, 시골에서는 아직도 여전한 관습이라고 다. 



대한민국의 아기들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일 테니, 내 아기가 기저귀를 차지 않으려고 도망을 다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두 해가 넘도록 24시간 제대로 통풍도 안 되는 일회용 종이 기저귀에 감금되는 건, 대한민국에 태어나지 않았면 겪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고통이었다. 부모 또는 사회가 만든 더러움에 관한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아기는 작은 엉덩이에 새빨간 발진을 만들면서까지 희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셀마 H.프레이버그가 쓴 <마법의 시간 첫 6년>이라는 책에는 '시민이라면 자기 기저귀 가는 문제에 대해 항의할 권리가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아기가 기저귀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어쨌든 그것은 자기 기저귀'이기 때문이다. 가정이 하나의 국가라면, 아기도 당당한 국민이 된다.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복지 혜택은 제일 많이 받아가고, 분탕질로 세간살이를 뒤집어 놓아도 처벌할 수 없지만, 에게도 국민으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깨끗한 기저귀, 여러 벌의 세탁한 옷, 그리고 위선적인 미소를 가지고 아기 곁에 대기하면서 아기가 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만든다. 그들이 원하는 일은 분명히 지루한 일이다. 선교사들은 아기가 쓰레기통이나 오물 바구니를 비우는 즐거움을 방해하기 위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셀마 H.프레이버그 <마법의 시간 첫 6년>



아기에게도 '항의할 권리'가 있다면, 지금까지 내가 기저귀를 채울 때마다 썼던 "착하지, 착하지, 정말 착하다."와 같은 말잘못된 것 같다. 기저귀를 채우려는 갖은 노력아기에겐 한낱 악당 짓으로 비쳤 텐데, "착하다."는 말은 얼마나 위선적인가? 나는 아기의 머릿속에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착한 것'이라는 등식을 심어주고, 아기를 구슬리고, 설득하고, 회유하며 자잘한 폭력을 저질러 왔는지 몰랐다. 



왜 나는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기저귀 입어줘서 고마워. 엄마 위해서 기저귀 입어줘서 고마워."



말투를 바꾼다고 기저귀를 향한 저항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위선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착하지."보다는 "고마워."가 낫겠다 싶다. 더 항의할 수도 있는데, 적당한 수준의 항의로 그친 것이 고맙다고,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아기'가 아니라 '고마운 아기'되는 라고. 고맙다는 말로 내 식대로의 육아를 강요하는 엄마의 죄책감을 전부 덜어낼 수는 없겠지만, 계속 고맙다고 말하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두 고마운 일임을 잊지 않게 되겠지. 



다른 건 바라는 게 없다고,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육아의 첫 마음을 떠올려 보면, 건강함을 상징하는 아기의 배변 활동 두 손을 조아리며 받아내도 모자람이 없는 귀한 행위 것이다. 더러움을 목격하는 것조차 신기하던 어린 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당연한 것을 늘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의심하는 엄마가 되기로 다시 결심다. 같은 것도 다르게 보는 말랑말랑한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더럽고 구질구질한 것 같은 엄마의 일상도 조금 젊, 조금 '귀여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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