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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Aug 08. 2019

아기로부터 화이트 인테리어 지키기

지우고 나면 결국 아쉬울 삶의 흔적들

 


신혼 초기, 집에 처음 놀러 온 조카가 우리 집을 보고 '콘도' 같다고 했다. 당시에는 깨끗하다는 칭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잘 모르겠다. 마냥 좋아할 말이었을까?





우리 집 도배지는 침실 벽을 제외하곤 전부 하얀색이다. 문도 창틀도 베란다 벽도 하얀 페인트로 직접 칠했고, 베란다 창에는 하얀 버티컬을 달았다. 이사 오기 전부터 있던 붙박이장과 신발장도 마침 하얀색이었고, 싱크대, 수납 바구니, 수건걸이는 직접 고른 하얀색이었다. 아기를 낳고 나서는 거실 전체하얀 매트 깔았다. 하얀색을 고집했던 건 대단한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하얀 집이 환하고 넓어 보이며 어떤 색깔 소품을 놓아도 돋보 같아서였.



가구최소한으로 샀다. 결혼 전 가구점에 계약한 가구는 식탁, 책장, 침대, 소파가 고작이었다. 거실장도 잠깐 두었으나 TV를 벽에 건 후에 퇴출되었다. 그 흔한 화장대도, 수납장도 사지 않았. 살다 보니, 액자나 화병, 예쁜 인테리어 소품이 놓여야 할 공간 엉뚱하게 손톱깎이, 건전지, 등 긁개, 전기 모기채 같은 것놓였지만, 나름대로는 미니멀하게 꾸민 집이었다. 때로 손님이 오는 날에는 '콘도'처럼 깨끗해지기도 했다.



몇 년 전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처음 방문했을 때, 이 집의 배경은 하얬다. 온화한 표정 부부와 방방 뛰어다니던 어린이 둘이 함께 사는 이었다.  전체 아이들캔버스 되어, 벽과 문마다 요란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당시 내겐 지저분 낙서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도배하고 페인트칠하면 괜찮을 거라애써 흐린 으로 바라았다. 계약을 마치고 그 집이 우리 집이 , 페인트 붓으로 그림 지우며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른다.



이후 나는 매일 새 도화지를 펼치는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부지런히 쓸고 닦고 정리하면서, 매일 집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작업을 했다. 약간의 수고로도 새것 같아지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우리 집에 새 식구가 들어오고 나서는 상황 조금 바뀌었다. 작디작은 아기 이부자리 위에서 꼼짝도 않고 천장만 바라봤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색 천장을.





갑자기 무시무시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보니, 세상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무늬가 없는 곳에 살고 있었는지 새삼 느꼈다. 누군가에겐 평화롭고 안락한 집지만, 아기에게는 무미건조 집이었다. 아기는 천장과 벽에 발라진 벽지를 보고, 세상은 온통 무채색이라고 단정 지을지 몰랐다. 유일한 가구는 침대와 붙박이장뿐인 방에서 세상의 물건이 다 저렇게 네모나고 단조로운 것이라 여길지 몰랐다. 나는 부랴부랴 아기의 눈높이에 맞 모빌을 설치했다. 허공에 매달 형들은 매일 똑같은 표으로  쳐져 빙글빙글 돌았다. 쳇바퀴 도는 일상처럼 무료해 보이는 인형이었지만, 그래도 방에서 유일한 총천연색이었다. 



종일 모빌만 보게 할 순 없어서, 벽보구해 붙였다. 붙일 방법이 셀로판테이프밖에 없어서, 나중에 떼어낼 때 벽지가 찢길 것을 각오하고 붙였다. 조리원에서 만든 모빌도 하나 더 걸었고, 병풍 책과 초점 책도 펼쳐서 아 옆에 늘어놨다. 아기의 눈길이 닿는 곳이라면 그곳에 '무언가' 있게 다. 세상이 공백뿐이라고 오해하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런 고민 오래가 않았다. 아기를 위해 사들인 수많은 물건으로 공백 손쉽게 꿔졌으니까. 거실은 금세 책과 장난감으로 어러졌고, 베란다와 창고는 아기 세간으로 득 찼다. 아기는 집을 뒹굴면서 침을 흘리고, 토를 했다. 조금 커서는 사방팔방 다니며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고, 화분 흙을 파 사방에 뿌리고, 장난감 바구니를 뒤집어 놓고, 책장의 책을 죄다 끌어내렸다. 치워도 치워도 어질러지는 속도를 따라을 수 없.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기가 색연필 몇 개를 야무지게 챙겨 현관으로 향하는  봤다. 스케치북에는 관심이 없고, 그리는 것보다 색연필 집구석구석에 숨기는 것만 좋아하던 아기였다. 그래서 난 아기작품 활동을 하러 가는 것이라곤 상상 못 했다. 현관 벽에 과감한 세로선 주룩주룩 그려대기 시했을 때 다급히 "안 돼!" 외쳤지만, 그림은 이미 완성 단계였다. 하얀 벽지에 색연필로 그린 그림을 지울 방법은 내가 알기론 없었다.



김애란단편 중에 <입동>이라는 소설이 있다. 대출을 끼고 샀어도 처음 가지게 된 내 집이라며 알뜰살뜰 아끼고 꾸민 아파. 하지만 어린아이는 온갖 사물에 침을 묻히고, 그림책을 찢었고, 엄마는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아이에게 과하게 언성을 높다. 소설의 배경이 내 상황과 비슷지만, 이 소설에는 공감하는 것조차 몸서리가 쳐지는 커다란 비극이 있다. 바로 집에 흔적을 남길 수 있던 유일한 존재를 상실하는 사건이었다. 아이가 떠난 후, 수납함 뒤 먼지 속에서 낙서 하나가 발견다. 그게 아이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가슴이 아파서 읽는 것조차 고통스다. 아무리 좋은 집일지라도 그 안에 사람이 없으면 그 집은 ‘빈집’이 될 뿐이었다. 평생 저축한 돈을 쏟아붓거나, 가능 한도의 대출을 전부 끌어 모아 마련한 집이라도,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매일 새집 같은 곳에서 살겠다는 건, 소설의 표현에 따르면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에 반하는 일이었. 집이 콘도 같다는 건, 사는 사람의 역사가 기록되지 않는다는 뜻이며, 지금까지 내가 세월이 만드는 흔적을 거절해왔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청소 노동이 그토록 고됐던 이유는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해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쓸고 닦아 처음처럼 도로 깨끗해질 수 있다면, 집은 물건의 속성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웃고, 울고, 성장하는 역사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집도 생명의 속성을 닮아가는 게 아닐까. 집에게 말해주고 싶어 졌다. 너는 낡고, 늙어가는 것 아니라, 아기처럼 자라고 있는 거라고. 아기가 벽에 그린 실선들은 무의미한 낙서가 아니라, 너에게 선물한 나이테라고.



잘한 기억보다는 실수한 기억이 머릿속에 더 오래 남는 것처럼, 아기의 실수는 이 꽃다운 시절 더 오래 기억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벽에, 바닥에, 침구에, 가구에, 욕실 줄눈에 남긴 천진한 흔적은 기억을 더 생생하게 지켜 줄 기록물이 되겠지. 나중에는 다 큰 아이와 일부러라도 찾아보고 추억하려고 한다. 그때는 아이를 현관으로 데려가서 색연필로 그린 추상화 작품을 감상하며 박물관 도슨트처럼 말해야겠다.



"이게 네가 생전 처음 그린 그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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