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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Aug 31. 2019

영유아 검사 때 소아과에서 들은 말

평범한 이도 쉽게 빠질 수 있는 '정상'의 함정

"해님이 영유아 건강검진받을 때 됐네요."



자주 가는 동네 소아과에서 들은 말이었다.



"예? 벌써요?"



돌 무렵에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3차 영유아 건강검진을 받을 시기가 된 모양이었다. 해님이는 이제 20개월이었다.



"좀 나중에 받으려고 했는데..."



3차 검사는 24개월까지 받으면 다. 미룰 수 있다면 최대한 미룰 작정이었다.



"왜요. 나중에 받으려다가 잊어버려요. 생각났을 때 그냥 받아요."


"그럼, 그럴까요."



콧물감기로 소아과를 오가던 중이라, 약을 타러 오면서 겸사겸사 검진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예약 날짜를 잡고, 문진표와 K-DST 한국 영유아 발달 선별 검사지를 받아왔다.







선별 검사지는 전에 작성해본 적이 있어서 낯설지 않았다. K-DST는 영유아의 대근육 운동, 소근육 운동, 인지, 언어, 사회성, 자조 등의 능력을 평가하는 검사 도구다. 영역별로 8개의 문항이 있고, '잘할 수 있다/할 수 있는 편이다/하지 못하는 편이다/전혀 할 수 없다' 해당하는 항목체크해야 다. 문항으로 갈수록 까다롭고 어려운 능력의 성취 여부를 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침없이 '잘할 수 있다'였다가, 뒤로 갈수록 체크를 못하고 자꾸 주저하게 됐다.



엄마가 되면, 내 아이가 모든 것을 '잘할 수 있' 아이이길 바라게 되나 보다. 능력이 우수한 아이부터 줄을 세울 목적으로 실시하는 검사가 아님을 알면서도, 내심 100점을 받고 싶은 욕망이 일다. 검사를 최대한 늦게 받으려 했던 것도 그런 욕망의 연장선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면 아기의 성취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거란 생각에서였다.



입학 시즌이 되면 발달이 늦은 자기 아이를 일 년이라도 늦게 보내려고, 유예 가능 여부를 물어보는 학부모님이 종종 있었다. 일 년을 유예한다고 해도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는 게 아닌데도 학부모님은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싶어 했다. 이제 보니 나도 다를 바 없는 엄마였다. 20개월에 검사를 받으면 20개월의 표준과, 24개월에 검사를 받으면 24개월의 표준과 비교하게 되는 거라, 언제 받아도 결과에 의미 있는 차이가 없는데도, 비합리적 믿음에 기대고 싶어 지는 거였다.



그래도 명색이 전직 특수교사인데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성 잃은 부모의 평가 때문에 문제가 있는 아이의 조기 개입이 늦어지는 경우 많지 않은가. 잘못 체크하면 아이의 문제를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으로 최대한 냉정하게 남은 문항을 메꿨다. '전혀 할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표기한 항목도 있었.



검사받는 날, 다시 소아과를 찾았다.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소아과였다. 사람이 많아 복잡 큰 병원에 비해 이용하기 편다. 대기 시간도 짧았지만, 병원에 설치된 놀이 시설이 키즈카페 수준이 아기가 좋아했다. 키와 몸무게를 잰 뒤 그네를 태우고 있는데, 해님이 호명되었다. 료실에 들어가 보니, 나이가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 컴퓨터에 미리 입력해놓은 검사 내용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키와 몸무게는 중간 정도 돼요. 키에 비해서 몸무게가 좀 적게 나가지만, 괜찮아. 그런데 해님이가 두 단어 문장을 말 안 한다고?"


"네. 아직 못하는데? 아직 한 단어로만 말해요."



의사는 못 한다고 하면서도 시종 당당한 엄마의 태도 영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뭐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최대한 객관적이고 엄격하게 작성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는 항목을 '전혀 할 수 없다'라고 표기했었다. 나는 "우유 주세요."나 "어린이집 가요." 정도는 해야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두 단어로 된 문장을 가르칠 때, 주어+서술어, 목적어+서술어 어순에 따른 단어 조합까지 기대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기가 반복적, 습관적으로 쓰는 문장 두 단어로 여기지 않았다는 걸 았다. 하지만 이젠 그거라도 들이밀어 모면해야 하는 상황이다.



"'또 줘, 까 줘.' 정도 해요. '앗, 뜨거', 이건 아닌가. '이게 뭐야?'도 하고요. 아, 이거는 두 단어 문장 맞는 건가."



몇 가지 말을 쥐어짜듯 생각해내는 내 모습 의사는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두 단어 할 줄 아네."


"하는 거였구나. 그러면 '할 수 있는 편이다.'로 고쳐주세요, 선생님."



의사는 마우스를 클릭해서 뭔가를 고더니, 나가도 좋다고 했다. 진료실을 나서자 내게 안겨 있던 아기는 장난감 경찰차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조금 더 놀다 갈래?"



품에서 내려놓 아기는 놀이방을 향해 달려갔다. 간호사는 정상 소견이 적힌 결과지를 건네주었다. 내가 표기대로 적용했다면, '추적 검사 요망'이나 '심화평가 권고' 등의 판정이 났을지 모를 일이었다. 다행스러웠다. 결과지를 보고 안심하던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해님아, 너네 엄마가 너를 모지리로 만들 뻔했다."



간호사인지, 간호조무사인지 모를 사람이 내게 한 말이었다. '모지리'라니. 생긴 것은 무딘 날 같은 말이 순식간에 비수처럼 날아와서 가슴팍에 꽂혔다. 당황하면 아무 말을 못 하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랬다. 간호사와는 자주 보아 친근한 사이이긴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라 반문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단히 위트 있는 농담을 한 것처럼 능글맞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더는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더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해님아, 가자."



나는 해님이를 장난감 경찰차에서 강제로 내리게 하고, 부리나케 소아과를 빠져나왔다.  밖에 나오고 나서야 자신이 비겁했다는 걸 알았다.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앞으로 계속 이용하게 될 병원이라는 생각이 앞섰던 걸까. 사람을 마음에서 지우는 게 최대의 복수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훗날 그녀가 누군가에게 또 같은 말을 하지 않도록 막았어야 했.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누군가를 '모지리' 취급을 하며 그것을 가벼운 농담의 소재로 삼는 일을 나만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교에서 만나는 학부모들도 비슷한 굴욕, 아니 더 심각한 굴욕을 겪으며 살아왔겠다는 생각 들었. 직접적인 비하 발언은 차마 못 했겠지만, 말투나 뉘앙스에 비하하는 태도가 묻어나지 않을 리 없었다.



애초부터 아이의 발달이 느린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 속에 병원을 찾았을 부모일 것이다. 의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건 낭떠러지 앞에 선 심정 같을 것이다. 낭떠러지 앞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기세를 하고 있는 이들에겐 한 떨기 바람도 얼마나 큰 위험이고, 사소한 말 하나도 얼마나 큰 상처일까. 아픈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의 마음 아픈 것도 조금 섬세하게 다루어 주면 안 될까.



나는 세상에 누군가를 '모지리'로 만들 수 있는 검사 따윈 없다고 생각한다. 평균의 범주와 가깝다 해서 대단한 특권을 가진 양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자만할 것도 없다. 평균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누군가의 인격과 존중받을 권리를 좌지우지할 잣대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세상 많은 사람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고지식한 잣대에서 자유롭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조차도 해님이의 검사를 받으며 '정상'이라는 말에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 소아과에서도 내가 '정상'이라는 말에 안심해버리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말을 쉽게 했겠지. 그녀의 말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나지만, 나 역시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경계심도 든다.



조심해야겠다. '정상'과 '비정상'을 내포하고 있는 말들을 무심코 쓰면, 세상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게 가능한 세상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아무도 '비정상'이지 않은 세상이었더라도, 입으로 '모지리'를 내뱉는 순간 '모지리'가 존재하는 세상, '모지리'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된다. 스스로 '비정상'이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인 것 같다. 무섭다. 스스로 만든 편견의 세상에 스스로 갇힌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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