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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on Sep 10. 2020

응시하는 자의 우울이 느껴지는 우물

Damien Rice [O] (2002)

2004년 이후 몇 년 동안 음악 카페만 가면 흘러나왔던 노래를 잊지 못한다. 아일랜드 뮤지션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의 곡 'The Blower's Daughter'였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 곡이 인기를 얻은 배경에는 영화 한 편이 존재했다. 그래. 맞다. "클로저"라는 작품이 없었다면 데미안 라이스를 향한 한국 팬의 애정은 지금보다 덜했을 것이다. 그 어떤 예술가든,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면 인생에 있어 결정적 터닝 포인트 하나 정도는 반드시 있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운"이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 데미안 라이스에겐 영화 "클로저"가 있었다.


글ㅣ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사진 출처ㅣ다음영화, @damienrice 페이스북


그로부터 2년 전 'The Blower's Daughter'가 포함된 데미안 라이스의 음반 [O]가 나왔다. 발표하자마자 주목을 받은 건 아니었다. 해외에서도 "클로저"가 개봉한 이후인 2004년부터 터지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5년 1월 데미안 라이스의 [O]는 영국 앨범 차트 5위를 기록했고, 모국인 아일랜드에서도 2위에 올랐다. 이 뿐만이 아니다. 같은 해 아일랜드의 유명 라디오 쇼인 "Today FM"에서 선정한 "지난 25년간 최고의 노래 25곡" 리스트에서 데미안 라이스는 'Cannonball'과 'The Blower's Daughter'를 각각 21위와 24위에 올려놨다.

이 음반의 정서적인 설득력은 당시 음악 카페/바의 풍경을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뭐랄까. 그 어떤 음악이든 걸리면 여지없었다. 바로 뒤에 이 앨범의 수록곡이 붙으면 기억 속에서 그 이전 곡은 자연스럽게 지워졌다. 기실 음반에는 별 게 없다. 보컬, 기타, 첼로가 거의 전부다. 진짜다. 한데 이 심플한 구성의 음악으로 작지 않은 공간이 단숨에 잠잠해지더니 이내 꽉 채워졌다. 그렇다. 하나의 곡이 하나의 우물이라면 데미안 라이스가 파놓은 우물은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었다. 응시하는 자의 우울이 느껴지는 우물이었다. 그것은 바로, 슬픔의 우물이었다.

어쩌면 용감한 앨범이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발가벗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기쁜 일은 대체로 말하기 쉽다. 나 같은 자랑왕에게는 더욱 쉽다. 하나, 슬픔은 다르다. 행여 나의 고백으로 저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까 미리 염려하게 된다. 슬픔은 그래서 일방통행이다. 그것은 오직 나 자신에게만 겨눠진 창 끝과도 같다.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에서 작가는 "슬픔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삶에 틈입한다. 쉽게 견딜 비법도 없고, 빠져나갈 구멍도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슬픔, 어떻게든 다뤄야 하지 않겠는가. "슬픔을 토로하라. 그러지 않으면 슬픔에 겨운 가슴은 미어져 찢어지고 말 테니" "멕베스"의 대사다. 데미안 라이스의 역사적인 데뷔작 [O]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면 이것일 게다.

슬픔에도 스케일이 있다면 데미안 라이스의 슬픔은 대규모다. 스펙터클한 슬픔이다. 'The Blower's Daughter'를 비롯한 모든 곡에서 데미안 라이스는 속삭이듯 노래하다가 이내 폭발적인 가창으로 듣는 이를 휘어잡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숨에 포로가 됐다.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보이질 않았다. 아니, 빠져나가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감정의 파고에 몸을 싣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감상했다.

기본적으로는 이별에 관한 노래들이다. 슬픔에 대한 송가다. 시간은 흘렀고, 관계는 무너졌다. 무너진 틈 사이로 슬픔이 파고든다. 우울이 들이친다. 바야흐로 상실의 시간이다. 모든 곡에서 주인공은 이별을 직감('Delicate')하고 있거나 이미 떠난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Cannonball'의 가사처럼 "여전히 조금 남아있는 너의 맛"을 곱씹는다. 그렇다고 크게 변한 건 없다. 연출가이자 작가인 론 마라스코(Ron Marasco)가 표현했듯이 "사랑이란 큰 것들이 살짝 뒤섞이는 게 아니라 작은 것들이 마구 뒤섞인 상태"일 테니까.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지/변한 건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셈이야/변함없는 하루의 시나리오/비는 똑같이 내리고/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지"        - 'Amie'의 가사 중

음반은 15분에 달하는 대곡 'Eskimo'로 마무리된다. 긴 러닝 타임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절정부에서 전례 없이 확장되는 곡 스케일과 클래식 성악의 협연, 반복적으로 내리치는 리프와 잔뜩 왜곡된 데미안 라이스의 샤우팅 등, 듣는 이가 무색할 정도로 시간은 순삭될 것인 까닭이다. 그래도 어렵다면 중간의 무음 구간은 제외하고, 수록곡들 중 하나를 3번 듣는 셈치면 된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체험이건 결코 지워지지 않을 기억에 맨 몸으로 노출된 자만이 쓸 수 있는 육필 수기 같은 앨범이 여기에 있다. 글쎄. 건너 들은 바로는 데미안 라이스는 그 누구와도 대별되는 민감한 촉수를 지닌 사람이라고 한다. 천생 예술가형 인간인 셈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주변에서 발생한 사건을 온 몸으로 받아낸 뒤에야 무언가를 창조하는 타입의 작곡가다.

사랑이 없다면 그의 음악은 없을 것이다. 이별이 없다면 그의 음악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과연 그렇다. 사랑과 이별 사이를 진자 운동하는 거리가 곧 데미안 라이스의 음악을 받아들이고, 사유하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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