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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여름 Dec 19. 2016

사람을 믿는다는 것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것처럼, 믿을 수 있을까

 스무살의 말과 서른의 말은 다르다.

스무살의 말이 막연하고 들떠 있다면, 서른의 말은 그보다 차분하다. 아는것이 많아졌으므로,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서른의 말들은, 그래서 가끔씩 아프다.

 

"여름아, 나는 사람을 믿지 않아."


 나보다 조금 더 사람을 만나는 일을 힘들어하던 친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아팠다. 이해해서 아픈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어서 아팠다. 14살때부터 나는 그 아이를 지켜봤다. 모두가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질투했던 아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고분고분한 성격, 무엇보다 뛰어난 성적덕분에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좋아했던 아이.

그래서 그 많은 질투를 감당하면서 마음을 닫았노라고 뒤늦게 내게 고백했다.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그 아이의 말이 아팠다.


  자신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때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어쨌건 쓸쓸한 기분이 든다. 나와 친한 저 아이는 나를 좋아할거라는 믿음,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뻐할 것이라는 믿음. 그런것들을 뺀다면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 그보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왜 만나는 것일까.





 사랑에  크게  패했던 남자와 사랑에 빠진적이 있다. 그 남자는 종종 무례한 말을 했다. 자상했지만 가끔 내뱉는 말들이 무례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남자에게서 들은 가장 무례한 말은 단연 이 말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아."


 지금의 나는 만일 다시 그를 만난다면 그 남자가 '세상의 고통과 상처는 다 뒤집어쓴 듯 한 말'을 내뱉을 때마다 아구창을 날려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는 저런 말들이 상처입은 한 남자가 내 뱉는 고독한 영화대사같은 말이라고 '매우 크게' 착각했다. 그 말은 연애를 하고 있는 나를 철저히 무시하는, 엄청나게 무례한 말이었음에도. 상처를 무기로 상대를 조종하려는 그 의도를 그때 파악했다면, 좀 더 일찍 헤어질 수 있었을텐데.....


 저런 '상처입은 남자'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 말고, 다른 의미로 사랑을 믿지 않는것 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20대 후반이 되면서 급속도로 현실적이 되는 여자아이들. 남자의 경제적 능력에 기대겠다는 말을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말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엄청나게 비현실적이다. '그런 남자가 너를 왜 만나니..'라는 말은 속으로만 하지만 아마 표정에 다 드러났겠지. 이런 철없는 경우 조차 아니라면 사랑을 믿지 않는 경우는 슬프게도, 사람을 믿지 않는 경우다. 사람을 믿지 않으니 사랑도 믿지 않는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아, 그리고 실연당한지 얼마 안된 사람이 '사랑을 믿지 않아'라고 하는 이야기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 된다.




회사에서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해진다. 입사 2년차인 나는 아직도 회사를 잘 모르겠다. 갓 입사했을 때 선배로 부터 들은 말은 '회사에서는 아무도 믿지 마라'였는데, 정말 크게 상처받을 때는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하다가도 좋을 때는 금방 잊어버린다. 내 생각엔 정말 회사만큼 피비린내 나는 곳도 없는것 같은데, 매일 가장 오랜시간을 보내야 하는 곳이다 보니 고민이 된다. 최근에는 회사생활을 정말 잘하는것 같아 보이는 선배가 이런말을 했다


 "회사에서는 연기를 해야지. 연기를 한다고 생각해. 돈벌러 온거잖아."


들을 때는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왔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슬픈 말이었다. 왜 슬펐냐하면, 그 이후로 선배의 친절과 호의, 그리고 웃음을 볼때마다 문득문득 의심하기 시작했으므로. 내게 보여주는 웃음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만큼 허무한 것도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만난 관계란 어쩌면, 가장 허무하고 슬픈 관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아, 내일부터 선배한테 칭얼대지 말아야지.... 사실은 엄청 싫은데 받아주는 걸지도 모르니까.





  운 좋게도 나는 사람을 잘 보는 편이라, 배신으로 힘들어한 적은 없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배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고해도, 내가 그 사람에게 기대한것이 애초에 없었기에 배신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정말 괜찮은 능력이라는걸 깨닫게 되었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믿는지도 모른다. 이 능력 덕분에 수 많은 짝사랑으로 아픈날들마저 행복했고, 연애를 오래하진 못했지만 누구보다 설레는 날들이 많았다. 인기가 많은 친구들은 가끔 새벽에 내게 전화해 낮은 목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 여름아, 나는 너처럼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는게 너무 부러워"


 그때는 내게 염장을 지른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그 아이들은 진심이었다.


 사람을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에 대해서, 일단 아는게 별로 없으므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은것 같다. 하지만 나의 경험으로는,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정말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내가 상대를 생각하는 것만큼 돌아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상대도 나처럼 만나서 이야기하고 밥먹고 노는 시간들이 기쁘리라는 믿음은 필요하다.


 그리고 믿지 않으면 안믿으면 그만일텐데, 그 친구는 왜 내게 굳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을까? 믿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리라. 그 말은 바꿔말하면 '나는 사람을, 사랑을 믿고 싶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회사생활은 연기라고 하던 선배도, 내게 '연기를 하는게 힘들다. 그만하고 싶다'라며 농담처럼 모든 직장인의 소망은 퇴사라고 했다. 이 모든것들이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아서, 자연스러워지고 싶다는 이야기들처럼 들린다. 어제 읽은 에리히 프롬의 책에서 현대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길들이기 때문에 공허해진다는 글을 읽었는데, 어쩌면 그것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사람을 믿는다는것은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범위와 의미가 다를것이고, 개개인의 경험들이 묻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말들을 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래도 나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때문에 설레고 기분좋은 일들이 많아야 한다. 결국은 그 기억들만이 가장 강렬하게 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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