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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Jan 13. 2018

평범한 출생 신고서

인민의 탄생 송호근 저. 


책 제목이 '섹시'해서 읽어 봤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고. 결과적으로 작은 기대마저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읽으면서 계속 가라타니 고진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고진 특유의 발랄함과 섹시함도 없고, 단지 그의 그림자를 추종한다는 느낌만 들었다. 그러나 둘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프라이드가 그것이다. 고진은 스스로 탁월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즐긴다. 이단 교주가 누릴 수 있는 영적 아우라를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송호근 역시 이점에서는 동일하다. 


" 근대 찾기에 나섰던 연구자들의 소중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발견한 요인들은 조선 사회를 500년 동안 유지 존속시켜 왔던 가장 중요한 골격의 한 단면이나 부분을 언급한 것에 그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p 375 "  


유사한 표현이 여러 곳에 나온다. 미시사 연구와 목적론적 연구 경향이 근대의 '거시적 구조' 이해에 실패했는데, 본인은 그런 한계를 뛰어넘어 '거시 구조의 변환'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는 프라이드가 처음부터 마지막 챕터까지 여러 번 나온다.  프라이드 자체는 중요한 덕목이지만, 콘텐츠가 도와주지 않으면 왠지 어설퍼 보이는 법이다. 조선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분석하는 여러 서책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인민의 탄생'이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송호근은 송호근 방식으로 근대화 과정을 분석했을 뿐이다. 


이 책의 부제는 '공론장의 구조 변동'이다. 담론이 공론이 되는 과정, 그 과정에서 언어(언문, 한글) 가 감당하고 있는 역할에 대한 분석이 기본 맥락이다. 언문이 조선 후기 인민의 삶, 유교적 세계관에 지배당한 인민이 종교적으로 문예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떻게 담론을 생산해 내고 유통시켰는가를 분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담론이 공론이 되고 공론장이 근대로 이어지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 주된 의도다.


이런 분석을 위해서 하버마스와 푸코를 여러 차례 초대한다. 초대하는 것은 상관없는데, 거의 매 챕터마다 등장하다 보니 20대 후반 어린 연구자의 박사 논문 같은 느낌이 든다. 그나마, 전체 길이가 짧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중복되는 내용이 너무 많다. 매 챕터마다 개론적 설명이 반복된다.  이 책 읽으면서 이삼성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가 계속 생각났다. 그 책을 읽고 나서 블로그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 사회과학서라고 하기에는 이 책에 눈물과 애정이 너무 많다.  단순한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학문적 구성이 너무 치밀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좋은 책이라고,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 중의 하나라고.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 


이 책 역시 사회과학자의 '우리 다시 돌아보기' 버전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눈물과 애정'이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독서의 즐거움도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내 잘 못일 수 있겠다, 기대를 어느 정도는 한.  

++

2011. 12. 17. 19:52 네이버 블로그에 쓴 글. 네이버 글을 시간날 때마다 브런치로 옮기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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