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 옆 조그만 통로입니다. 농로라 하면 더 예쁘겠네요. 가장 좋아하는 100m 길입니다. 길, 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쓴다면 이 길 때문일 겁니다. 그저 평범한데 참 좋아요. 이 길을 걸으면서 다른 사람은 무엇을 심었는지 그것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게 됩니다. 도와줄 것이 있는지 살피게 됩니다. 이렇게 길은 관심이고 또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길은 이렇게 함께한다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이번에 심은 새봄 사형제입니다. 모종은 아직 이르고요. 씨앗은 조금씩 심어도 됩니다. 봄에 알타리 심어보기는 처음입니다. 잘 자라겠죠!!
이주 전 감자 심는 곳입니다. 아직 싹이 나오지 않았어요.
씨앗 심기 전에 삽질하고 있습니다. 멋있게 찍어달라 부탁했더니 쓸만한 사진이 없어 옆모습 사진 골랐습니다.
대충 이런 식으로 밭갈이했습니다.
위 네 종의 봄 작물 씨앗을 땅에 뿌린 후에 찍은 사진입니다. 빨간 것이 알타리입니다. 크고 하얀 것이 강낭콩이고요.
씨앗 부리고 흙 덮고 물 주고 오늘 농사 끝냈습니다.
조금 멀리서 찍은 농장 풍경입니다.
그러나 반대편 은행나무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이 사진만 놓고 본다면 가을 풍경입니다. 이제 이 은행나무도 푸릇푸릇해질 겁니다.
4월 7일은 일이 있어 농장일을 못 했고요. 14일 오후에 위 씨앗을 심었습니다. 21일은 부활절이고 15일부터 20일 가지는 고난주간입니다. 죽음과 부활의 시간입니다. 씨앗을 땅에 뿌리면서 묵상을 합니다. 이 봄날에 왜 죽어야 하는지를 묵상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죽음은 절연, 무망, 공포 등과 동의어가 됐고 한국 기독교의 많은 목사들은 그 죽음을 무기로 종교를 장사했기 시작했습니다. 흥행을 위해서 죽음을 최고한도로 고조시켰고 천국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했습니다. 일상의 삶과 죽음을 허구적 소설로 연결해 죽음을 일상화시켰고 공포를 내면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공포심은 시간과 공간을 의식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 호모 사피엔스가 이 봄날에 씨앗을 뿌립니다. 씨앗은 땅에 떨어져 묻힙니다. 이 씨앗에서 싹이 나옵니다. 씨앗과 싹 사이에는 흙이 있고 수분이 있고 어두운 공간이 있고 기다림의 시간이 있습니다. 씨앗은 부활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죽음은 없었습니다. 모든 과정이 삶의 순환 속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