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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Jul 15. 2023

향연에 초대받은 비렁뱅이 느낌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저/박유하 역


읽으면서 계속 자신이 위축되고 있는 느낌과 향연에 초대받아 황홀한 감정, 두 감정이 씨줄, 날줄로 교차됐다. 계속 공부, 연구할 생각도 없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분명해졌다. 이 정도 스칼라쉽은 있어야 연구자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 잘 빠진 도자기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흙의 성질, 나무의 생태학, 온도를 다스리고 사람의 화를 다스리는 인내와 연륜, 그리고 그 도자기를 갖게 될 누군가를 위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그중 나는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고진을 읽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됐다. 그래도 좋다. 일찍 포기하고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


좀 아깝다. 이런 좋은 책은 처음 잡았을 때 쭉 읽어 나가야 하는데 이런저런 번잡한 일이 있어서 거의 두 달 만에 끝냈다. 처음 부분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시 들쳐보기 시작한다.


서양의 풍경화는 기하학적 원근법과 함께 탄생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이전에 회화에 있어서 풍경은 종교적 혹은 역사적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 안에서 배경으로서 존재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기하학적 원근법은 한 점에서 바라보는 투시도법이기 때문에 이야기적인 시간성을 가지는 대상을 처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이야기를 가지지 않은 단순한 풍경으로서의 풍경이 그려져야 할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p 30


문학을 회화에 투영시켜 생각해 보면 근대문학을 특징짓는 주관성이나 자기표현이라고 하는 발상 자체가 세계는 [고정된 시점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 파악된 것이라는 사태와 대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하학적 원근법은 객관뿐만 아니라 주관까지 만들어내는 장치인 것이다. p 32 


원근법 혹은 근대적 장치에 의해 풍경은 탄생한다. 풍경의 발견은 그런 근대적 장치에서 벗어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 리얼리즘, 소설, 내면 모두 근대의 풍경이다.


[내면]이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호론적 인식 구도의 전도 속에서 비로소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내면]이 성립하면, 맨 얼굴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p 62


그림에서 문자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표의문자에서 그림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문자의 근원성 혹은 데리다가 말하는 원原에크리튀르를 보지 못하게 해온 것은 문자란 음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긴 음성주의적 사고에 있다. p 62


우리 맥락에서 [추상적 사고 언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언문일치]라고 할 수 있다. p 54


내면의 발견은 이렇게 언문일치, 즉 근대적 언어시스템에서 출발한다.


고백이라는 형식, 또는 제도가 고백해야 하는 내면 또는 [진실한 자아]라는 이름이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지가 아니라 고백이라는 제도 그 자체에 있다. 감춰야 할 무언가가 있어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이라는 의무가 감춰야 할 무언가를 혹은 [내면]을 창조한다. 그러고는 그 사실 자체가 완전히 잊히는 것이다. p 115


메이지 20년대에 있었던 [국가]와 [내면]의 성립은 서양 세계의 압도적 지배라는 상황 아래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점을 비판할 수는 없다. 비판해야 할 것은 그러한 전도의 결과물들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오늘날의 사고들이다. p 134


내면, 고백, 병, 아동 모두 근대에 발견되는 개념들이다. 일일이 인용하고 설명하려니 길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 내가 봤을 때 - [구성력에 대하여]라는 챕터다. 그동안 안갯속을 걷던 기분이었는데 이 챕터가 나에게 탈출구를 줬다. 현재 기획하고 있고 일부 쓴 책을 이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더 공부해야겠지만...


나중을 위해서 몇 문장 기록해 두자


원근법적 공간에 익숙해지면 그것이 [작도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마치 그때까지의 회화가 [객관적]인 현실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p 192


원근법적 배치는 어떤 문학적 가치도 결정하지 않는다. p 193


원근법은 회화나 문학뿐만이 아닌 모든 시점과 관련된 문제 p 194


고대의 미술에서 개체가 항상 [공간]과 별도로 존재했다면, 즉 여러 개체들이 불균질 한 공간에 속해 있었다면, 중세 미술은 이 개체들의 실재성을 일단 해체시키고 평면의 [공간적 통일체] 속에 통합한다. p 195


++


2014. 11. 7. 13:12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 하나하나씩 브런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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