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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Jan 28. 2016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지음


벤야민뿐 아니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진의 발전을 목격한 서유럽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예술, 매체, 미학에 관한 고민을 했고 간단한 에세이라도 여기저기에 발표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우리는 살아남은 몇 편의 콘텐츠를 접할  수밖에 없지만 당시 지식인들의 고민은 모든 매체에 그대로 녹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 가져온 예술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파장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한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보다 더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사진과 영화를 겪었기 때문에 좀 더 편한 관전평을 쓸 수 있다. 장점이자 단점이다. 벤야민에게는 모든 것이 최초였다. 그래서 그의 고민은 당연히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에서 출발한다.

    

요약해 말하자면 원본과 복제 사이에서 아우라가 방황하고 있다. 예술은 본래 제의적 속성이 있다. 제의는 아우라를 전제로 집단적 동의를 획득한다. 아우라는 특정 시공간을 상징하기도 하고 시간을 초월해 전통적 의미를 구성원들에게 부여하기도 한다. 예술작품은 아우라를 통해, 아우라는 예술작품을 통해 사회적으로 계승된다. 간단하다. 원본이기 때문이다. 하나뿐이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독창적이다. 복제시대 이전 모든 미학의 시작과 끝은 이 아우라에 대한 찬미이거나 분석이었다. 예술이 제의를 통해 신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되기도 하고 신이 인간에게 선포하는 메시지가 되기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세 모든 시와 음악도 동일하다. 궁정에서 한 사람만을 위해 연주하거나 낭송한다. 당연히 아우라가 차고 넘친다. DVD로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는 복제 음악에서는 그런 아우라가 없다.   

  

대중의 등장, 계급사회의 출현, 예술의 대중화. 이제 아우라를 지상으로  끌어내려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한다. 당연히 복제가 필요하다. 사진에서 아우라를 찾는다. 근데 원본이 아니다. 아우라의 속성을 화학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제의 가치에서 전시가치로 이전된다. 전시행위는 공간에서 벗어나 스스로 공간을 창조하거나 어느 공간에서도 적응하는 행위다. 아우라가 특정 시공간에서 벗어난다. 의식에 바탕을 둔 예술에서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둔 예술로 화학적 변화를 겪는다. 초기 사진이 사람의 얼굴을 담았을 때는 그래도 아직 전통적 아우라가 남아 있었지만 사람에서 파리의 거리로 앵글이 옮겨가면서 제의적 가치는 사진에서 사라지게 된다.  

 

사진이 공간에서 벗어나면서 사진은 관찰자/기록자가 된다.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건축물보다 사진 속에서 보이는 건축물을 통해 우리는 그 건축물의 특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오리지널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사진 속의 건축물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그리고 그 확장 버전이 사진의 연속 촬영, 영화다. 러시아의 선진적 영화들, 찰리 채플린, 미키 마우스에 대한 그의 에세이에서 조작된 현실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파시즘의 영화정책에 대한 비판이 언급된 이유다.    

 

읽기에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챕터에 중요한 내용이 대부분 언급되어 있다. 첫 번째 챕터는 건너뛰어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된 이야기다. 이 책은 미학사를 쓰기 위해 구매했다가 이런저런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생겨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오래 묵혀 있다가 가까스로 완독 한 책이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모르겠는데 교양서로는 그저 그렇다. 물론 벤야민의 잘못이 아니다. 시대가 이미 많이 바꿨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사색의 시대가 아니다. 나도 읽고 싶지 않았다. 책을 사면 꼭 읽어야 한다면 강박증이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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