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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Feb 15. 2016

조선왕조의 기원

The Koryo Origins of the Choson Dynasty

존 B. 던컨 [조선왕조의 기원, The Koryo Origins ofthe Choson Dynasty]


박노자의 한글 실력에 놀랜 적이 있다. 그가 한국 고대사  전공자였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랬다. “나도 모르는” 가야사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알게 됐다. 박노자뿐만이 아니라 한국사를 전공한 외국인 학자들이 많고 그들의 지적 수준과 학문적 성과가 정말 탁월하다는 것을. 한국사를 외국인들이 공부할 수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을 정말 모르고 있었다. 기껏해야  몇몇 일본 학자 제국 주의 시절 이후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해왔다고 알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무식했다. 학생 시절 내내 한국사가 아닌 국사를 배워온 후유증이다. 내 사고의 일부는 아직도 분단된 반도의 남쪽에 머물러 있었다/있다.


존 B. 던컨의 [조선왕조의 기원]의 영어 제목은 [The Koryo Origins ofthe Choson Dynasty, 조선 왕조의 고려적  기원]이다. 기존 한국사 주류가 정설로 주장하는 신진 사부론에 대한 논증적 반박이다. 저자는 우리가 교과서처럼 달달 외웠던 “성리학에 기초한 지방 향리 출신의 중소 지주/사대부들이 중앙 귀족의 무능함에 저항하여 무신 계급과 연합하여 조선을 개국하고 숭유억불정책을 펼쳐.…  “라는 내용을 데이터를 통해 논박했다. 저자의 결론은 심플하다.


“ 1392년의 왕조 교체는 혁명이라기보다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10세기의 노력이 4세기 이상 흐른 뒤에 정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p 397 “  


이 주장을 하기 위해 중앙 고위 관료의 가계도와 관직 현황, 시대에 따른 권력 이동 과정 등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결론은 신라 말 – 고려 중기 – 고려 말 –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집권 세력의 권력 분포에는 혁명적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왕조는 늘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를 희망한다. 고려 건국 초부터 몇 차례 계획이 있었다. 광종처럼 분명한 성과를 보인 왕도 있었고 원나라 치하의 일부 왕처럼 무능한 경우도 있었다. 원심력을 회복하려는 노력들이 계속 있어 왔고 그 과정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건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그 뒤 이어지는 개국 드라마다. 정치 시스템 차원에서 보면 고려와 조선은 별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하부구조인 경제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 고려왕조가 멸망한 것은 결국 자국의 신하들이 저지른 것이었다. P 14 “


혁명적 변화가 아니라 왕을 교체한 정도의 의미라는 것이다. 야심만만한 이성계의 등장과  위기의식을 느낀 중앙 귀족들의 합작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성혁명의 느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중국의 무수한 왕조 교체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었던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두환의 등장처럼 지도자에 대한 섹시한 포장이 필요한 시점마다  조선 왕조의 건국은 적절한 소재를 제공해 왔다.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 대결, 선죽교에서 정몽주의 마지막 순간, 개혁 전도사 정도전의 전략, 왕위를 둘러싼 왕자들의 난 등이 고정 레퍼토리를 등장하면서 조선의 개국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대한민국과 같은 수준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고 그 구조적 프레임을 역사학자들이 제공해 왔다. 우리에게 조선 개국은 역사적 필연이었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의 주장이다.


몇 문장을 적어 둔다.


“ 세습적인 중앙 관원의 흥기는 고려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특징의 하나다. P 84


“ 고려 전기와 마찬가지로 과거 급제자가 다른 수단으로 입사한 사람들보다 더 큰 권위를 누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P 121 “


“ 중앙 양반이 군현의 향리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심연을 인식한 것은 14 - 15세기 한국 사회/정치사의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준 전환적 사건이었다 p 144


“ 이성계가 흥기 한 결과 3개의 주요 가문만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은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가 사회적 혁명을 수반하지 않았다는 추가적 증거다 p 166


“ 1품 관원의 100명의 노비는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부 대부분의 농장보다 많은 숫자다. P211


최근의 연구는 서자에 대한 차별의 주된 동기는 팽창한 중앙 관원층을 줄이려는 필요였다고 주장한다. p 315


“ ‘신흥 사대부’ – 그런 집단이 존재했다고 해도 – 는 새 왕조 건국의 주요한 세력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정주학이 1392년에 그 계층을 대표하는 이념으로 승리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p 339


“ 조선의 건국자들이 선호한 종류의 유학은 개인적 자기 수양과 지방의 자치 기구를 통해 사회를 재건한다는 정주학의 방안과는 거의 무관했음이 분명하다 p 375


“ 무신 집권기/원 간섭 기동 안 추락한 왕실의 권위, 공민왕과 우왕 등의 무능력, 양반의 권력을 위협한 외국 신하/노비/환관에 대한 의지와 그에 따른 신분제도의 약화 --- 양반이 등 돌린 이유 p 391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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