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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Sep 25. 2016

6. 여행자에겐 기차표가 필요하지 않다.

비행기표도 ㅇㅇ

매주 수요일은 회사에서 허락하는 정시 퇴근의 날이다. 기차 시간표처럼 딱 맞춰 6시에 일을 끝낼 수는 없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의례 그렇듯이 수요일에 환한 얼굴로 퇴근하는 사람들을 보며 몇몇은 연인과 만날 것이며 몇몇은 하고 싶던 공부를 할 것이며 몇몇은 해묵은 취미생활을 다시 꺼내본다.

나의 수요일은 이 중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작년에 인연을 맺은 우루과이 친구와 함께 보내고 있다. 그녀는 스페인어를, 나는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속칭 언어교환을 하고 다. 꽤나 진지하게 임하는 나의 바람 때문에 카페에 몇 시간이고 앉아 각자의 작문을 교정해주고 단어 맞추기를 하는 등 마치 과외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근 한 달간의 공부 덕분에 이제 어느 정도 문장을 만들 줄 알게 되어 지난주는 카페에 가지 않고 광화문 일대를 산책했다. 광화문 교보문고로 시작해 무교동에서 냉면을 먹고 청계천을 따라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오는 3시간 동안 우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상대방의 모국어로 떠들었다.

짧은 문장도 겨우 만드는 나는 주로 그녀에게 질문을 하고 무려 두 문장이나! 이을 줄 아는 그녀가 한국어로 대답하는 식으로 우리의 대화는 이루어진다. 그녀는 혼자 여행한 지 20개월 된 여행자인데 혼자 여행하는 즐거움은 혼자 있다는 것이며 반대로 괴로움 또한 혼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것, 장엄한 것을 보고 느껴도 그 기분을 나누고 공감할 사람이 없고 있다고 해도 그 길을 떠나면 그와 나눴던 기억도 같이 떠나보내야 한다는 점에 아쉬워했다.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이미 여행자인 그녀에게 여행은 어디로 가는 동시에 원래 있던 곳을 떠나는 것이다. 여행자는 매일 이별하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맛있는 빵집을 찾아도 발을 옮기는 순간 그곳의 빵은 다시 먹을 수가 없다. 3달 동안 마음 맞는 친구와 그 나라의 언어를 교환했다 하더라도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심지어 그에게 연락을 할 수는 있을지 조차 알 수 없다. 내 페이스북에는 같이 유우니 사막을 여행한 친구들, 같이 이탈리아에서 재즈 페스티벌을 본 친구들이 가득하다. 서로가 여행자라는 이유만으로 한없이 가까웠지만 지금은 그들의 소식을 들으며 작은 이모티콘을 보내 주는 정도가 나와 그들의 교감의 전부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장소와 풍경, 사람은 여행자에게 더 이상 자극을 주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봐도 나눌 사람이 없고 오로지 혼자만의 기억으로 간직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전보다 덜 감탄하고 덜 기록하며 덜 웃게 된다. 그때부터 그들의 여행은 일상이 된다.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떠난 여행 또한 일상이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새로울 수 있는가 언제 감탄할 수 있는가.


어제 헤어지던 순간 그녀를 배웅하며 나갔던 광화문 대로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왼편에는 세종 문화회관이, 정면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보이는 그 광경을 보며 그녀는 외쳤다. '이건 처음'이라고. 그 말이 맞다. 분명 그 하늘과 그 공기, 그날의 광화문은 몇 번이고 와봤을 그녀는 물론 그녀보다 더 많이 광화문을 왔을 나에게도 처음이었다.

곧 한국을 떠날 그녀의 외침이 매일이 새롭기 위해서는 매일이 떠나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떠나기 때문에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떠나고 헤어지기 때문에 그만큼의 의미를 가진다. 지금 주어진 순간을 마지막처럼 여기는 것이 반대로 그것을 새롭게 느낄 수 있다.


여행자를, 그것도 곧 한국을 떠나는 여행자를 친구로 둔 덕분에 내가 익숙하게 느끼는 것들을 낯설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 덕분에 서울의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다시 새롭게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언제나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찾아 헤맸으면서 결국은 그것들에 익숙해서 무덤덤해진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멀리 떠나지 않아도 매일을 여행하는 것처럼, 매일 감탄하며 사는 여행자의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


@iquitos(a.k.a. Amazon), peru. 2010.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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