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더니 시치미떼듯 갑자기 멈추는 소나기, 금붕어를 산책시켜도 좋을 정도의 습기는 영락없는 '동남아'의 그것이다. 살면서 많은 동남아 국가에 가 봤지만, 이런 날은 가장 오랫동안 머물런던 동남아 국가인 방글라데시를 떠올리게 한다.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로 알려진 그 곳에서 나는 한 달 동안 있었다.
시골에 있는 은행의 2층, 작은 방이 내 거처였다. 잠깐이었지만 내 일상은 바빴다.
조약돌 굴러가는 소리로 우는 초록색 도마뱀에 익숙해 질 때 즈음, 우리로 치면 한강격 되는 강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소중히 들고 다니던 가이드북 - lonely planet - 에서 애써 그곳을 관광지로 묘사했지만, 그곳은 생활 용품을 파는 좌판이 길게 늘어져 있고,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있는, 다시 말하면 관광명소라기보다는 그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방글라데시에 와서 여유없이 일만하던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들에게는 당연했지만 나에게는 놀라웠던 물건들 - 빙빙 돌리면서 바람을 내는 부채나 짚을 엮어 만든 접시 - 을 들춰보며 여행용 가방을 파는 곳에 가 가방을 둘러 보고 있었다.
'이건 주머니가 많지 않네', '빨간색이면 좋겠는데'따위의 혼잣말을 하는 나에게
검은 얼굴의 가방가게 주인이
빨간 가방을 드릴까요?
하고 내 모국어로 말을 붙였다.
후일 그 날의 일을 추억하면 그가 나에게 말을 건 순간 너무나 크게 놀란 것이 아닐까, 혹여 그것이 무례한 행동은 아니었을까 후회하게 된다. 타지 생활에 외로워하던 나는 거의 일 주일 만에 듣는 모국어라 반가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호들갑스럽게 반가워하는 나와 차분한 방글라데시 남자는 그 자리에서 근 30분을 나의 모국어로 잡답을 나누었다. 남자가 내온 차를 홀짝거리며 나는 남자에게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셨냐
고 물었다. 그는 내가 건설현장에서 가끔 보았던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 중에 하나였다. 내가 무서워하던 사람들 중에 한 명과 내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우루루 몰려 다니던 그들을 보았을 때는 마냥 낯선 이방인으로 보였는데 여기서 가만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이방인이 아닌 '그'(오래되어 이름을 잊었다)로 느껴졌다.
남자와 수다를 떨고 헤어지는 길. 남자에게 물어 보았다
'한국 사람들이 밉지는 않느냐고'
한국에 와 일을 하면서 무시당하고 설움을 받았을 그에게 나는 왜인지 모를 부채의식을 느꼈다. 남자는 한국 사람들은 밉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밉지 않다고도 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아니라 '나'라고, 그리고 나와 당신은 친구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그를 만난 뒤로 어떤 집단을 미워하거나 좋아하게 될 때에는 그 집단을 이루는 한 사람을 생각한다. 사람은 '사람들'로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