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권, 호텔 예약 알림 메일을 몇 개 받고 나자 나는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정해진 일을 하면 되는 하나의 수화물이 되어 버렸다.
방콕의 호텔은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로비에 들어선 순간 에어컨의 냉기가 나를 반겼다. 낮은 조도의 노란 조명으로 꽉 찬 방에 들어가 자연스럽게 룸서비스 메뉴를 들춰봤다. 원두커피, 샌드위치를 주문처럼 외우고 침대에 앉아 고개를 돌리니 비로소 아름다운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지금 내가 방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생이 되고 첫 배낭여행을 앞둔 나는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카오산’이라는 낯선 단어가 궁금해 검색을 하니 바로 여행자들의 이미지가 나왔다. 요란한 머리를 한 배낭여행자들이 분주한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책을 보거나, 아니면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저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 그들의 여유가 부러웠다. 고작 3주짜리 배낭여행이었지만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기에 나는 들떠 있었다.
카오산 로드. 배낭여행자의 성지. 나는 그곳으로 갔다.
한번 빨면 찢어질 것처럼 얇은 몸빼 바지를 사고, 노랑 빨강 실로 머리를 땋았다. 길거리에서 팟타이를 먹으며 검게 그을린 피부의 배낭여행자들과 히히 낙낙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목적 없이, 이유 없이 3주를 보냈다. 하루는 파타야에 가기도 하고 어느 날은 수상가옥을 보러 가기도 하고, 그날의 일정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즉흥적으로 정해졌다. 합장을 하고 있는 맥도날드 마스코트를 보러 가는 것조차 재미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것들 전부가 흥미로웠던 세계. 나에게 카오산 로드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어떤 부도덕한 일을 한다고 해서 나를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에서 나는 내가 절대 하지 않는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금지된 약물, 음란한 행위는 모든 것이 자유로운 그곳에서도 내가 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덕분에 그 어떤 곳에서도 그것들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20년 넘게 같이 살아온 나라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다시 간 카오산 로드는 시끄럽고, 더웠다. 여전히 사기꾼, 히피, 히피가 되고 싶은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나는 어쩐지 불편했다. 나를 놓아 버리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돌아다니기에는 내일의 미팅이, 귀국할 항공편이 마음에 걸렸다. 두툼한 지갑에 신용카드도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5시간을 날아왔지만 나를 놓고 오지 않은 탓이었다. 아니, 출장을 오면서 나를 놓고 올 수 있으리라 기대한 내가 멍청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