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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Jun 02. 2018

너는 어느새
잊혀진 유적처럼 남아서

나를 아프게 해

요즘 통계학에 관심이 많아져서 관련 책을 읽던 차에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무료 동영상 강의 사이트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동영상 강의를 하나 신청했다. 

대학교 교수님들이 동영상 강의를 만들어서 무료로 배포하는 식으로, 집에서 편하게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니 참 좋은 세상이구나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대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아 들떴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필통에 색색깔 형광펜을 넣고, 아직도 가지고 있었네 하면서 0.3mm얇은 펜촉을 자랑하는 펜을 들어 괜히 낙서를 해 보았다. 언젠가 한번은 보겠지 하고서 한 번도 안 본 요약 정리 노트를 펼치자 거기에 지난 연애 시절의 기록이 낙서처럼 쓰여 있었다. 낙서에 퉁!하고 치인 나는 그 진동과 함께 십 년 전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연애 초기였던듯, 애인과 내가 같이 하고 싶은 50가지 일들을 쭉 적은 내용이었다. 


1. 맛있는 칼국수 먹기
8. 야구장 가기
11.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 고르고 서로 선물해주기
26. 수박화채 먹으면서 무한도전 보기
50. 삼청동 카페 골목 걷기


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21. 태국 스킨스쿠버
24. 일본 온천
36. 세계일주 계획 세우기
48. 담배 끊는거 도와주기


같은 거창한 것들도 한 가득 있었다. 


이 중에 우리가 몇 개를 했었더라. 
우리는 세 번의 여름을 같이 지냈었는데. 우리는 서로 많이 좋아했고 또 그만큼 미워한 적도 많았는데. 저 50개의 일들 중에 몇 개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서로를 빼 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일상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은 기억난다. 아니 그것을 느낀다. 


박준 시인의 시 처럼, 

'한 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어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 때는 그것이 한 철의 마음인지도 모르고, 그냥 막연히 
언젠가는 우리가 헤어질 수도 있겠지 언젠가. 둘 중에 한 명이 죽거나 아니면 아프거나 하면 말이야. 이 마음이 없어져서 헤어지리라고 상상하지는 않았을 꺼다. 

그 사이에 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낡은 노트에 적힌 낙서를 보기 전까지 너는 없던 사람처럼 여겨졌을까. 그 때의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지금 너에게 남는 감정은 사과할 수 없는 미안함 뿐이다. 이런 식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해서, 그 마음이 지나가버린게 온전히 다 내 탓인것만 같아서 그리고

네가 몰래 써 넣은 51번째 약속을 지금의 애인에게는 지키리라 다짐하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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