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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Jun 10. 2019

애인이 나를 비난 할 때-나의 가스라이팅 극복기

퇴근 후 심리상담소

그 날, 퇴근 후 심리상담소로 나를 이끈 건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린 예전 애인 때문이었다.


작은 스타트업에 대표로 있던 그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지독히도 미워했다.


당시 4년차 직장인이던 나는 지긋지긋했던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본격적으로 나를 위한 소비를 하고 있었다. 계절따라 바뀌는 옷가지들, 승진자축 기념으로 산 시계, 부모님께 사드린 로봇청소기까지!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사치'와 '허영'이라는 이름으로 폄하했다. 심지어는 그에게 주는 선물도 내 허영의 반증이라는 듯이 말을 했다. 그의 생일에 선물로 준 가방을 보고 그는


"이까짓 가방가지고 내가 좋아할 줄 알았으면 착각이다."

"네 잘난맛에 사주는 선물이니 하나도 기쁘지 않다"

"이거 주고 생색 내는게 꼴보기 싫으니 당장 환불해라"

고 말을 했다.


돈과 관련된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할 때마다 이런 식의 말이 반복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는 기분좋은 날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내가 무엇인가를 사거나 사지 않거나 하는 모든 행위를 '사치'와 '허영'의 범주에서 생각했다.

계속해서 그 말을 듣던 나는 그의 말처럼 내가 정말 사치스럽고, 허영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에게 무참하게 짓밟힌 다음 날에도 나는 어김없이 출근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그에게 느낀 모멸감이 문득문득 떠올라 눈물이 흘렀다. 동료들과의 관계도 방어적으로 변해 버렸다. 매일 다른 사람과 점심을 먹을 정도로 사람 만나는걸 좋아하던 내가 점심시간이 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혼자 처박혀 있기 일쑤였다. 그를 만나면서 나는 점점 우울해졌고, 말수가 적어졌다.



그 때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게 힘든 시기였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느 날은 나를 포함한 10여명이 참석한 회의에서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감추려고 계속해서 하품하는 척을 했다. 하품을 하면서 손으로 입이 아닌 눈을 가리는 나를 보고 몇 명 동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때의 끔찍한 감정은 손닿지 않는 곳에 묻은 오물처럼 나를 괴롭혔다.



그 때 마침 심리상담대학원에 다니는 후배와 연락이 닿았고, 후배의 권유로 심리상담소에 가게 되었다.



"애인에게서 들은 모욕과 비난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서 저를 괴롭혀요"


"그가 무슨 말을 했나요?"


"내가 사치스럽고 허영심이 많으며 무능하고 가치없는 사람이라고 말을 했어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중에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나요?"


"... 아니오. 다른 사람들 중에 저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왜 그 사람이 한 말이 다른 사람들이 한 말보다 더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 사람은 제 애인이고, 굉장히 확신에 찬 상태로 말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와 비슷한 정도의 애정을 가진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있어요. 아주 많이 있어요. 가족, 오래된 친구들, 다른 애인들은 그런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의견에 동의하지도 않을 거에요"


"그렇다면 그의 말은 그냥 그의 의견일 뿐이네요"



두 계절이 바뀌는 동안 상담선생님과 함께 수없이 자문하고 되새김질하면서 나와 그의 관계를 한 발짝 떨어져 보는 연습을 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마치 십계명처럼 절대적으로 보이던 그의 말이 그냥 '의견'으로 보이게 되었다.



나중에 가서는 그가 나에게 한 행동이 상황조작과 세뇌를 통해 나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상담이 끝나고, 나는 상담소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말이 나에게 큰 상처로 다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 한 사람의 의견일 뿐이고, 그 사람의 의견이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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