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늘 절망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혁명을 일으킵니다.
다버리고 맨몸으로 서 있다 눈물로 꽃을 만들고,
속이 환히 비치는 실크 같은 향기로 스스로를 감싸다 다시 불타
모두 버려 버립니다.
그러다 덤덤한 이파리로만 자신을 감싸 근엄한 생활을 합니다.
이윽고 낙엽으로 그들마저 떠나가면
그 자리에 예기치 않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열매조차 떠나고나면 뼛속까지 근신하다
그 속에서 가장 매혹적인 꿈 = ‘내년의 꽃’을 그려 냅니다.
내년이 되면 그리하여 키가 자라 하늘에 더 가까워집니다.
- 구본형의 <일상의 황홀>중에서
절망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미웠습니다.
이 미운 것을 어떻게든 나에게로부터 떼어놓고 싶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봤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벗어나려하면 할수록 절망은 더 바짝, 더 깊이 스며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련과 상실투성이인 삶에,
언젠가는 그 고단함으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조자 품을 수 없다니.
도무지 살아갈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
그 완벽한 절망이 제게 준 것은 '진짜 삶'이었습니다.
저를 지탱해왔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비로소 벗어나고만 싶던 지금 여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렇게 나를 그리 못견디게 하던 시련과 상실에 눈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용기를 낼 수 있었냐구요?
그것은 용기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웠습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끔찍하던 시련과 상실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겁니다.
처음엔 그 흔적을 지워나가는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자각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지금, 여기 내가 머무는 현장에 정성을 들이는 만큼
제 안에서 뭔가 살아나고 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신기해 또 조금 더.
그렇게 저는 '절망'을 양분으로 살아날 수 있었고,
덕분에 '절망'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었습니다.
어찌 절망 뿐일까요?
'절망'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었던 체험은
나도 모르게 '해로운 것'으로 낙인찍어 밀어내려고만 하던 것들을 다시 살피게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그 모든 것들이 오롯이 축복이었음을.
우리의 삶은 살아있음으로 충만한 축제가 됩니다.
https://youtu.be/f-ILWcspo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