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수행자

유난히도 잡초가 무성한 마음밭을 일구어가는 자

by 아난다
아주 작은 골방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무 바닥에 벽은 전부 황토로 만든 방이면 좋겠다.
작은 나무 책상 하나에 나무 의자 하나,
그리고 바닥에 놓은 꽤 큰 방석 하나가 이 방을 채운 소품의 전부다.
나는 이 방을 ‘삶의 방’이라고 부르고 싶다.

살다 보면 관성을 이기지 못하는 때도 있다.
이 방은 어제와 결별하는 방이며 특별한 오늘을 부여받는 곳이다.
매일 이 방에 들어와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
살다 보면 탐욕에 젖을 때도 있다.
이 방은 탐욕의 때를 벗는 곳이다.
살다 보면 인간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감정적 변이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 방은 분노를 죽이는 방이고 질투와 자만을 죽이는 방이다.
살다 보면 무기력해질 때도 있다.
이 방은 무기력을 툴툴 털고 걸어 나오는 방이다.

살다 보면 무서워지고 비겁해지는 때도 있다.
이 방은 그것들을 벗어버리는 방이다. 그리하여 용기를 얻는 곳이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슬픔을 줄 때도 있다.
이 방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곳이다.
이 작은 방은 늘 내가 새롭게 태어나게 도와주는 공간이 될 것이다.

- 구본형의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중에서


어제와 결별하고 특별한 오늘을 부여받는 공간,

나무책상과 나무의자, 큰 방석하나만 놓인 황토방이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공간이 생길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런 공간을 열망해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공간을 열심히 찾아다녔던 적도 있었습니다.

참 좋은 공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었으니,

'나를 구원해줄 무언가'를 찾아다니느라 돌보지 못해 어수선한 공간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이 곳에만 있을 때는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새로운 공간을 체험하고 나니

머물던 그 곳이 더 답답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떠남이 잦아질수록 머무는 곳은 더욱 어수선해져갔고,

나중에는 이곳만 아니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열정'과 '실천력'이라면 더 이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인데

왜 삶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던 그 시절보다 더 팍팍해지기만 하는 걸까?

역시 온 삶이 '황토방'으로 이루어진 그 삶, 세속을 버린 수행자의 삶으로 들어가야 끝나는 걸까?

하지만 애들은 어쩌고? 답도 없는 번뇌는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바보같죠?

'황토방'은 잠시 멈추어 자신을 살피고,

지금 여기 내 삶에 가장 소중한 그것을 보살피는 시간과 공간의 '상징'이라는 당연한 진실을 받아들이는데

왜 그리 오랜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걸까요?

아마도 진실을 가리고 있던 군더더기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려나요?


잡초가 유난히 빨리 자라는 밭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바로 그런 밭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합니다.

같은 생명을 잡초라 칭하는 것이 불편해서 생긴대로 살아보겠다 고집을 부렸던 적도 있었지만,

아무리 고쳐 생각해봐도 제가 그 밭에서 키워내고 싶은 것은 따로 있더라구요.

영문도 모른채 그저 스승의 가르침대로 부지런히 김을 매었던 덕에

그 밭에 이미 아름다운 씨앗들이 심겨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거든요.


조금만 방심을 해도 탐욕, 분노, 질투, 자만, 무기력이 무성해지고 마는 밭이지만

이젠 다른 밭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앉아 한포기 한포기 뽑아 밭옆에 가지런히 모아둡니다.

이 아이들도 이유없이 자라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냥 제초제를 확 처버리면 그만인 일을 뭐하러 그리 고단하게 사냐구요?


이것말고는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없거든요.

내 마음의 밭에 심기워진 빛나는 씨앗이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 말고 '해야할 다른 일'이란

결국 어차피 뽑아낼 잡초를 더 무성하게 하는 일이라 믿게 되었거든요.

그렇게 오늘도 세속의 수행자로서의 하루를 열어갑니다.

나를 위한 황토방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삶임을 조금 더 깊이 받아들입니다.


파란색 일러스트 학교 입학 설명회 일정 포스터 (인스타그램 게시물) (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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