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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Feb 02. 2022

'다 알았다'는 생각이 찾아올 때

모험을 멈출 수 없는 이유

판도라의 마음상자를 열고
세상으로 튀어나온 네 번째 불행은
‘자아에 대한 무지’였다.
신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죽고 만다.
날마다 같은 삶을 살아가지만,
‘내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저주처럼 끔찍한 것이 있을까!

무엇이 되어, 무엇을 하다 죽으면 가장 자기다운 것인지 찾아 헤매지만
결국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삶이란 결국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기나긴 모험인 것이다.
삶의 모험이 없는 자, 아무도 아닌 자로 살 수밖에 없다.

- <구본형의 신화읽는 시간>중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부자가 된다면, 유명해진다면' 보다는

훨씬 가능성있는 조건이라고 믿었던 것도 같습니다.

나만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클리어할 수 있는 미션이라 생각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특별히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구조로 태어나서일까요?

만사를 제껴놓고 '나를 이해해보겠다'고 기를 쓰는데도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잠깐씩 뭔가 알것만 같은 황홀함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 제게만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없습니다. 

어김없이 또 새로운 내가 나타나 묻습니다.

'네가 아는 내가 다일까?'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야 내가 나를 좀 알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더라구요.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지!'하는 오만은

배움으로 향한 감각들을 일제히 마비시키고 마니까요.

오래 중심없이 흔들리던 세월의 한풀이라도 하듯

겨우 조금 안 그것으로

존재 자체를 딱딱하게 굳혀버리려 드는거죠.


당연히 삶이 헛돌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는 도리없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고

다시 흔들림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제 삶이 이 패턴의 무한반복임을 알아차렸을 때의

좌절감을 잊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달까요.

어차피 끝도 없을 이 험난한 여정으로 저를 이끌었던

그 모든 존재들을 있는 힘껏 저주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요.

그 와중에 펜을 찾아

바로 그 순간 저를 통과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더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다 토해내고 나자

글자들 사이로 매직아이처럼 떠오르는

새로운 제가 있더라구요.

어찌나 반갑고 기쁘던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알아가는 항해 그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제게

종종 찾아오는 흔들림의 멀미는 필연이었던 겁니다.

미지에 대한 불안은 극복해야할 장애가 아니라

마땅히 누려야할 축복이었던 겁니다.

이 참에 저 스스로에게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를 알아가는 모험, 수행을 나누며 살게 된 것은

더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더 알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다 알았다는 생각은 수행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파문을 알리는 신호임을 잊지 말자.  

더불어 어차피 죽는 그 순간까지 하게 될 일이니

무리할 이유가 없다.

그리도 좋아하는 그 일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축복을

겨울날 곶감 빼먹듯이

야금야금, 아껴가며 누려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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