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난다 Feb 02. 2022

어디로 가더라도 결국!

본질을 관통하는 수련의 현장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행동의 동기는 욕망이다.
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욕망이 없이 우리는 무엇도 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욕망은 좋은 것이다.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다.
욕망을 잃어버리는 날 우리도 죽는다.

욕망에는 끝이 없다.
그것은 태양처럼
거의 무한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이 강력한 에너지를 내 삶에 사용하려면
적절히 운영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예를 들어,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식탁에서의 식욕을 줄여 과식을 막아야 한다.

욕망의 불길을 키우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 통제력을 가지는 사람이
바로 자기여야 한다.
그 권리를 타인이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중에서


욕망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동력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지금 이 순간 상반되는 욕망의 줄다리기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것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피곤해 죽겠는데 그 이유를 물으면 딱히 할 말도 없습니다.


이때 보통의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묻는 사람을 공격하거나, 자기 자신을 공격하거나.


다른 사람을 공격할 때 그 논리는 한결같습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말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향한 거짓말이 자꾸만 늘어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을 위해 희생만하다

이런 상황에 처했다고 믿어버리게 됩니다.

 이때 손가락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던 존재가

발산하는 에너지는 가히 파괴적입니다.

근처에 머물면 누구라도 상처입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물론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존재는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지만요.


자신을 공격하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지, 한심하기는.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지.

대체 어쩌려고 그러니?

사람들에게 짐만될 뿐이잖아.

이런 나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낫지.'

자기주문이 되풀이 될 수록 말은 현실이 되어갑니다.


다시 이 모든 안타까움의 시작인

상반된 욕망의 줄다리기 현장으로 돌아가 보기로 합니다.

줄다리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힘을 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의 경우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살다보니 어떤 선택을 할 경우에도

필연적으로 감당할 책임(비용)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욕망의 줄다리기란

가능한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얻고 싶은 욕심,

바꾸어 말하면

최적의 효율을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은 두 욕망의 효과와 비용을

머리로 가늠해 최적의 효율을 달성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그정도는 알 수 있다구요?

물론 대부분의 경우엔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를 잘 검토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문제는 이 검토를 위해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에

우리가 너무나 인색하다는 거죠.


멈추어 살피는 검토 역시

삶을 최적화시키고 싶다는 '욕망'의 또 다른 옵션입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지도

역시 해보지 않고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니 상반되는 여러 욕망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 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린다는

그리스인 조르바식 처방을 따르던지,

그것이 너무 무모하게 느껴진다면

스스로에게 '멈춤'을 허하고,

차근차근 자신이 욕망을 다루어온 방식과 그 결과를 검토해보던지.


둘 다 위험해보이기는 마찬가지라구요?

아! 또 하나의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냥 하던대로 끝까지 아무 선택도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위험을 피하려다 맞이하는 위험을 온몸으로 경험해 보는 것!

그러고 나면 말이 필요없더라구요.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던 두려움을 헤치고,

욕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스스로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피하고 싶던 궁극의 두려움을

직접 맛본 자에게만 찾아오는 용기입니다.


이 세 가지 길중 당신은 지금 어디쯤을 걷고 계신가요?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는 이미 자신의 욕망을 다루는 수련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셨나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본질을 관통하는 수련의 현장이 펼쳐진다니,

어찌 삶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찌 스스로 선택한 그 현장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다 알았다'는 생각이 찾아올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