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명상, 빛과 어둠 그 모든 곳에서 기쁨을 만나는 수련
실패에 대해 과도한 책임을 묻는 관행도 버려라.
무사안일과 태만한 실수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잘해보려다 안 된 실패는 오히려 권장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도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백에서 나온다.
좌절이 깊어야 성공이 빛난다.
실패는 성공에 의미를 부여한다.
휴먼 드라마가 늘 매력적인 이유는 성공 속에서 실패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 구본형의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중에서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할 실패와 권장해야 할 실패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
무사안일과 태만이 굳이 권장할 덕목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만나고 싶지 않은 모습이 분명합니다.
고백하자면,
저의 전반기 삶은 바로 이 흉물스러운 실패의 징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안간힘이었습니다.
마치 몹쓸 병을 옮기는 병원균이라도 되는 양,
진저리를 처가며
어떻게든 감염되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잘 해보려'는 모든 시도는 다 해봤던 거죠.
그런데 그 엄청난 노력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제 경우, 놀랍게도
바로 그 '무사안일과 태만' 그 자체였습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소진되어
그야말로 손가락 까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겁니다.
너무나 깜짝 놀라 이래서는 안 된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럴 수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 다그쳤지만
그럴 수록 상태는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갈 뿐이었습니다.
성공이나 성취는 커녕
기본적인 일상을 건사해나가는 것조차
버거워질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사는 게 형벌처럼 느껴졌습니다.
죽음이 휴식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삶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냐구요?
그러게요.
그때 당시야 그저 살아내기에 급급해
자세히 살필 여유가 없었는데요.
어느정도 기운을 차리고 나자
저 스스로도 저를 살아나게한 매커니즘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아주 꼼꼼히 그 시절을 복기해보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살려낸 일등공신이
그리 끔찍해하던 바로 그
무사안일(無事安逸, 큰 탈이 없이 편안하고 한가로움.
또는 그런 상태만을 유지하려는 태도)과
태만(怠慢,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없고 게으름)이었다는 것을요.
그때 그 상태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한껏 게으르도록 스스로를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이
회복의 시작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여한없이 '무사안일'과 '태만'을 누리고 났더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잘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더라구요.
물론 그렇게 '잘하고 싶은 마음'이 보름달처럼 꽉 차오르면
어김없이 조금씩 달이 이울 듯 '무사안일'과 '태만'의 시기가 찾아오게 마련이구요.
들숨과 날숨이 호흡을 이루고
밤과 낮이 하루를 이루듯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순환할 수만 있다면
'잘하고 싶은 마음'과 '편안하고 싶은 마음'
모두가 꼭 필요한 덕목임을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 거죠.
수련은 바로 그 '자연스러운 순환'을 도와주는 장치입니다.
움직여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
엄밀해야 할 때와 너그러워야 할 때를 알아차릴 수 있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멈추어 살피는 시도가 '살림명상'수련입니다.
멈추어 살피는 수련은
어쩌면 '엄중히 책임을 묻는' 행위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질문의 목적이
단죄가 아니라 살림에 있다는 것,
그러하기에 서로에게 가장 친절하고 부드러운 방식을 찾는 모색에도 기꺼이 정성을 다하는 것이겠지요?
https://youtu.be/kZVvYYOldtI?si=aFBXHMPmYctBjt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