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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Feb 03. 2022

삶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비움으로 더 풍요로워짐을 몸으로 아는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선택

낡은 언어를 버리고,
나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차용할 때 드는 비용을 버리고,
본질이 아닌 허영이라는 껍데기를 버리면
비로소 단출하게 시작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 버릴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사람은 먼 길을 갈 수 있다.
중간에 짐이 무거워 쉬지 않아도 되고,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하고 건실한 뿌리를
현실 속에 깊이 내릴 수 있다.

- 구본형의 <내가 직업이다> 중에서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을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출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해볼까?'하는 마음이 생긴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물개박수를 쳐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얄궂게도요.

온갖 마음의 저항을 다 뚫고 막상 출발선에 섰는데도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누리던 사회/경제적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작가로 살겠다는 마음먹기가 쉬웠을리가 없는데

막상 책상앞에 앉으면 한 줄 쓰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이라 그렇겠지,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만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나를 만납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얼른 그 전보다 더 '폼나는' 삶에 가 닿아야 할텐데...


버리고 온 것들의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온 몸의 피가 점점 더 빨리 돌기 시작합니다.

어디보다 안전한 내 방 책상에 앉아있는데

마치 서바이벌 100미터 달리기 경주를 하고 있는 듯한 긴장감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어갑니다.


그러나 삶은 우리를 너무나도 지극히 사랑하시어,

'단출'하게, 그러니까 아주 작게 시작할 준비가 될 때까지는 결코 '시작'을 허락해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작해야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하고 건실하게 뿌리내리며

현실속으로 깊어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한여름 무성했던 잎은 물론

찬란한 꽃의 결실인 열매마저 다 떨구고

오롯이 본질만 남긴 나목으로 겨울을 나는 나무의 선택이

결코 스스로를 모질게 괴롭히는 피학적 선택이 아님을 이제는 알겠습니다.

비움으로 더 풍요로워짐을 몸으로 아는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진실로 기꺼운 선택임을

이제야 조금씩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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