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난다 Feb 09. 2022

고백이 어려운 당신에게

거절의 두려움 너머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것들

나는 세 가지 종류의 시간의 강줄기를 만들어냈다.
하나는 나를 위해 흐르는 시간의 강이다.
이 시간의 강물 위에서 나는 읽고 생각하며 자연과 만나고 쓴다.
이것은 고독한 시간이다. 알지 못하는 것들의 시간이며,
그들의 정체를 눈치채는 시간이다.
이 시간의 강물 위에서는 내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이 흐름 속에서 나는 나의 세계를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며 즐긴다.

또 하나의 시간의 강줄기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 가족을 위해 늘 시간을 남겨놓았다.
친구들을 위해서도 늘 시간을 남겨놓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 언제고 한가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건달이다.
낮에도 술을 마실 수 있도록 그들과 만나는 다음 시간은 비워두었다.

세 번째 시간의 강줄기는 세상과 내가 만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대체로 책과 강연과 홈페이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찾아내주기를 바랐다.

- 구본형의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중에서


결국은 여기란 말인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며 야심차게 시작했던 여정이 11년차를 맞던 그 여름

동네 신경정신과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던 저는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습니다.


10년 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끝에 그 삶이 제가 원하던 삶이 아님을 알아차렸습니다.

덕분에 이제는 어찌 살아야할지,

아니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1년간 스스로와 깊은 질의응답을 나눈 결과,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10년간은 오직 나를 위해, 그리고 아이를 위해 가진 시간을 다 쓰겠다고.

제가 맞은 위기가 희미한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밖에서 인정과 칭찬을 구하느라 정작 내 존재의 핵심기반에 대한 돌봄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선택이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충분히 시간을 쓰고, 이 시간을 통해 얻은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쏟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에 없이 애뜻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영혼을 나누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구나.

이미 충분한데 늘 그 다음, 그 다음이 기다리고 있는 기쁨의 보물섬에 도착한 느낌이었습니다.

맹세컨데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던 저는 왜 스스로 정신과 병원을 찾아갔던 걸까요?


스스로 약속했던 10년이 끝나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위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시간을 다 쓰고 나면 저절로 그 다음 세상이 열리는 거라며?

 근데 이게 뭐야?

지금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다인 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이제 나도, 아이들도 충분히 준비가 되었는데

버선발로 저를 맞으러 나와 줄거라 믿었던 세상은 어쩐 일인지 꿈쩍도 하지 않는 겁니다.

나는 결국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이용하려고 했던 건가?

그동안 어찌어찌 다독여 놓았던 제 안의 독설가가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참았던 독설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그 존재는

제 몸과 마음과 일상을 순식간에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결국 일상을 건사해 낼 힘이라도 되찾기 위해

스스로 정신과 병원을 찾아야 했을 만큼요.


결론적으로 첫 번째 상담을 한 이후,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나 주1회 50분에 25만원짜리 상담을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이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제주행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경제력을 잃게 되면서

가성비가 완전히 검증된 영역이 아니면

돈을 쓰기가 주저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인색해진 영역이

모험에 대한 투자였습니다.

검증된 것만으로도,

이미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자족하는 연습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자연스럽게 차오르는 모험에 대한 열망을

억누르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 결과가 그저 일상을 건사하기 위해

한 달에 100만원의 상담비가 필요한 상태라니요!

기왕 이리 된 바에야

망하면 돈 아까울까 봐 미뤄두던 일들을

다 해보기로 했습니다.


아무 계획없이 여행을 떠나고,

유튜브 제작 수업을 듣고, 장비를 사고,

 10년간 고집하던 뚜벅이 생활을 청산하고 차를 사고,

오래 찜해둔 명상수련에 참석하고,

난생 처음 빵을 굽고, 식혜와 생강조청도 만들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아주 빠르게 에너지가 차오르더라구요.

과정 자체가 치료라고 마음먹으니

에너지 뱀파이어였던 성과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탄력을 받아 망할까 봐

주저하던 세상과의 연결을

하나하나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속만 끊이던 상대에게

고백하는 기분으로요.

물론 숱하게 까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마음이 통하는 상대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기쁘게 사랑을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기듯이,

모색의 과정을 누리다보면

자연스럽게 성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세상과 만나는 시간의 강줄기가

넓어져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하나의 강이 모두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지만,

더 경이로운 것은

세 개의 강줄기가 서로 섞이며 만들어내는 바다입니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믿었던 시간들이

서로를 살리며 합쳐 흐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 신비로 저를 이끌어준 세상의 모든 존재와 모든 경험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안의 어린 마음을 대하는 자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