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료시카. 인형속에 인형이 몇 겹이고 들어있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를 열고 있는 기분이야. 늘 대하는 일상적 틀을 벗은 새로운 당신의 모습이 신선하다. 물론 약간은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같은 제목으로 두 번 보내서였겠지? 당신은 아마 내 두 번째 편지를 읽지 못한 채 답장을 한 것 같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당신이 그 편지를 읽어본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솔직히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아물어 가는 상처를 일부러 헤집을 필요가 있을까. 지금이라도 ‘발송 취소’를 누르고 싶은 유혹이 있는 것도 사실이야. 그러나 아마도 나는 당신앞에 나의 마트료시카를 끝까지 열어보이는 이 위험한 작업을 결코 멈출 수 없을 거야. 나는 온전히 이해하고 싶고, 또 이해받고 싶은 욕망을 빼고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당신은 사랑이 남을 위해 자기를 사르는 것, 즉 ‘헌신’이라고 했네. 그리고 의미있는 헌신을 위해서 대상의 가치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도 했지. 그러니까 당신의 ‘사랑해’는 ‘너를 위해 나를 바칠 각오가 되어있어, 영원히’란 의미였던 거구나. 알고 나니 새삼 당신의 사랑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이런 귀한 사랑속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사랑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니 나도 참 바보네. 아마 사랑을 주고 받는 방법의 차이 때문이었겠지?
당신의 글을 읽고 있으니 <여우와 두루미>라는 이솝우화가 생각난다. 절친한 친구였던 여우와 두루미, 오랜만에 두루미를 만난 여우는 반가운 마음에 두루미를 식사에 초대하고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성찬을 마련했지만 두루미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지. 여우가 접시에 내어놓은 음식을 먹기엔 두루미는 너무나 뾰족한 부리를 갖고 있었거든. 우화에선 두루미가 앙심을 품고 여우를 초대해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 내놓잖아. 호리병에 들어가지 않는 뭉툭한 주둥이를 가진 여우 역시 배를 곯은 채 두루미의 집을 나설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호의로 시작되었던 초대로 둘은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
어릴 땐 그냥 재미있게 듣고 말았던 우화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 참 슬프고도 안타까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관계에 대한 수많은 반성을 하게 만드는 우화지.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여우와 두루미에게 가장 절실했던 덕목은 무엇이었을까? 그래.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였을 거야. 당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소중한 헌신을 더욱 가치있고 보람되게 하기 위한 관심’이 필요했던 거지. 여우가 평소 두루미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를 관심있게 보아두고 두루미를 위해 호리병을 장만하는 정성을 쏟을 수 있었더라면 일부러 애를 써서 마련한 파티가 오히려 관계를 해치는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테니까.
두루미도 마찬가지야. 여우가 마음을 표현하는 법이 서투를 뿐 악의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섭섭해할 필요는 없었을 거야. 그리고 오히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답례를 준비할 땐 여우를 위해 납작한 접시를 마련하는 센스를 발휘할거야. 만약 두루미가 더 현명하다면 여우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것도 잊지 않겠지? 물론 여우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어때? 이쯤하면 여우와 두루미의 파경을 막을 수 있으려나?
이렇게 고비를 넘기고도 그들에겐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겠지? 그들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한 존재와 존재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체가 본래 어렵고도 험난한 일이기 때문일거야. 서로를 진심으로 원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언어(스킬)’를 모두 갖고 있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일이지.
이제 두루미와 여우 이야기는 그만두고 우리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 그 전에 우선 사랑이 ‘소중한 대상을 위한 지속적인 헌신’이라는 당신의 정의가 퍽 마음에 든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어. 당신의 사랑에 담긴 관계에 대한 의지와 책임감이 특히 좋아. 바로 그 굳건함이야말로 우리의 관계를 지금까지 지탱시켜준 힘이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현재를 즐기며 그 기쁨의 에너지로 미래를 열어간다. 오프수업때 내가 발표한 삶의 자세였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우째 이리도 빡빡한 것인지. 나의 이론은 현실을 품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만든 틀 안에서 넘칠 만큼 나를 사랑하는 남편, 그런데 문제는 내가 원하는 프레임이 그와 좀 다르다는 것이다. 그와 나의 그 차이는 우리 사이에 틈을 점점 크게 만들었고, 현실속에서 그가 주는 기쁨은 제대로 누려볼 새도 없이 그 틈을 통해 빠르게 새어나가고 있었다. 기쁨이 모이지 않는 공허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는 피해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이 모든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현재를 즐기며 그 기쁨의 에너지로 미래를 열어가겠다.’고 말하던 나는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남편이야말로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허망한 심정이 아닐까?
우선 남편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우리 사이의 틈을 꼼꼼히 메우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현실의 사람인 남편의 사랑을 현실의 저울로 재서 받아들이자. 현실에서 얻은 수익은 현실을 위해 재투자하는 여유를 연습하자. 그렇게 현실을 원활히 돌아가게 한 후 여유자금으로 조금씩 천천히 미래를 열어나가는 거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꾸준히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거다.
작년 이맘때 썼던 일기중 한 부분이야.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아. 삐진 두루미였던 내가 조금씩 여우의 입장과 나의 잘못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 그러고 보니 이 글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쓰고 있는 편지의 씨앗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이때의 깨달음이 씨앗이었다면 내가 가장 절실히 이해받고 싶은 사람이 다름 아닌 당신이었다는 각성이 그 씨앗을 싹 틔우게 한 양분이었을 테고.
우리의 이 메일은 우리만의 언어를 갖기 위한 시도야. 둘 다 서로를 이렇게나 소중히 생각하는데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지 못해 오해라는 독극물에 관계를 해쳐간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니까.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한 단어 한단어가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야.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여우 두루미 커플보다는 훨씬 현명하다는 것을 믿어보기로 해. 맘 상하고 섭섭한 것 있으면 바로 바로 말해줘. 나도 그럴게.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당신이 내게 하는 첫 번째 기대가 사랑이라고 했지. 이것은 ‘당신에 대한 나의 지속적인 헌신’을 기대한다는 말이잖아. 그 헌신의 방법으로 당신이 제시한 것이 ‘문 닫는 것, 모기향 피우는 것, 얘들 잘 돌보는 것, 건강에 주의하는 것, 항상 조심하는 것’이고. 알겠어. 당신이 이런 것들을 통해 사랑받는 느낌을 갖는다는 걸 알았으니 정말 신경써서 노력해볼게. 오늘 이후로 적어도 ‘문단속’과 ‘모기향 피우기’로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을거야.
그런데 여보. ‘애들 잘 돌보는 것, 건강에 주의하는 것, 항상 조심하는 것’ 이건 좀 너무 애매한 것 같지 않아? 육아는 여기서 다루기엔 너무 중요하니까 뒤에 따로 이야기한다 쳐도, 건강과 안전은 순전히 개인적인 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나도 당신 못지않게 건강하고 싶고 또 안전하고 싶어.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방법을 갖고 있기도 하고. 보기엔 한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터치하는 건 좀 오버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야.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조언은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잔소리에 불과한 거니까. 이 부분은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믿고 존중해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내가 당신에게 가장 스트레스 받는 영역이 아마 이 부분일거야. 당신의 틀이 너무 강하고 디테일하다는 거. 당신은 어떻게 그걸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강제없이도 30년간 잘 살아왔다구. 당신이 좋아서 하는 거라면 말리진 않겠지만 나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좀 참아줬으면 해. 이 부분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련한 문제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또 하나 당신이 말한 기대의 항목은 어쩐지 좀 억울하다. 당신의 나에 대한 기대를 한마디로 형상화하면 ‘조심성 넘치고 순종적인 여인’이라는 얘긴데 이건 당신이 결혼전에 이상형이라고 말하던 ‘자기 세계가 있는 활달하고 다정다감한 여인’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잖아. 당신이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더람 당신에게 절대 시집 안 왔을텐데...(이 부분은 절대적 해명을 요함)
ㅋㅋ 방금 당신 전화 받고 왔어. 메일이 넘 길다구? 알았어. 그만 할게. 얼른 보내고 약속대로 모기향 사러가야지!!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