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육아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아 답장을 잘 못쓰겠네. 옛날 귀족 집안처럼 글쓰기, 무술 스승이 따로 있고, 거기에 시중드는 하인까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갑자기 4대 성인 중에 하나인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등은 좋은 육아를 받았을까 생각을 해보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2,000년 이상 지났으니 비교자체가 옳지 않겠지.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교육수준들이 낮았기 때문에 별로 육아에 대해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겠지. 얘들한테 고기만 잘 먹여주면(肉兒) 훌륭한 부모님이 되었을 것 같은데.
이제는 단순히 얘들과 잘 놀아주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육아를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 얘들과 잘 놀아준다고 어느날 갑자기 한글을 알게 되고, 영어를 알게 되고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렇다고 얘들과 놀아주지도 않으면서 한글이니 영어니 미술이니 음악이니 공부만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고. 참 육아는 너무 어려운 것 같아.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만히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의미에서 내가 훈이와 영이 육아에 대해 신경을 별로 안 쓴 건 사실이야.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이제부터는 따뜻한 마음으로 잘 놀아주는 연습을 해야겠어. 훈이가 실수하더라도 화를 덜 내고 자신이 깨닫도록 하고 미안하게 느끼도록 말이야. 즉 내가 화를 내더라도 (화를 안내면 자기가 잘못한 것을 모를 수도 있으니까) 강도를 조금씩 떨어뜨려야지.
그래서 갑자기 "나는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좋다"라고 이야기하도록 해야지. 스스로 깨닫게 되면 이보다도 더한 얘기도 조만간에 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지. 그리고 나도 술 좋아하는 소크라테스가 되고, 독일어 잘하는 소크라테스가 되고 하고 싶어. 뭐 소크라테스 시절 독일어 자체가 거의 없었겠지만서도...
보낸 사람 : 미* 11.9.1 12:31:23
나한테 미안해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나 역시 누군가 알아서 잘 키워줬음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일부러 신경을 안 쓰려고 해서가 아니라 도대체 어디서부터 신경을 써야할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지레 포기하고 있었던 것 같아.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도 해야하고, 또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로바로 성과가 보이는 것도 아닌 ‘育兒’에 까지 할당할 자원이 어디 있느냐고 나름 그럴 듯한 핑계도 만들어 두고 있었고.
뜬금없지만 당신 혹시 ‘고3병’이 왜 생기는 줄 알아? 열심히 공부하는 애들은 ‘고3병’같은 거 안 걸려. 꼭 딴 짓하는 애들이 새삼스럽게 하지도 않던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괴로워 하잖아. 왜 갑자기 ‘고3병’ 얘기를 꺼내냐구? 휴직 전의 내가 앓던 증세가 꼭 그랬거든. 물론 그보다 훨씬 복합적이고도 심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엄마’라 딴엔 잘 키워보겠다는 욕심은 있어 가지고 일하면서도 이리저리 책도 보고 잘 한다는 사람 이야기도 들으면서 기웃거려봤지만 헛갈리기는 마찬가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쪽으로 혹하고, 또 딴 데 가서 딴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도 맞는 것 같고. 물론 이것저것 다 해보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시간도 돈도 턱도 없이 부족하고. 여기에 '일관성'없는 게 최악의 육아라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면 그야말로 진퇴양난. 하루하루가 좌절이지.
그러다 보면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애는 내팽게쳐 놓고 여기서 이 삽질을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들고, 그런 상황에서 일이라고 손에 잡힐 리 있겠어. 잘 하던 일도 재미없어지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기피대상 1호인 ‘아줌마 직원’으로 낙인찍혀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지. 여기에 ‘나는 이렇게 애를 쓰는데 아빠라는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는거야?’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 모든 원망이 몽땅 남편에게로 쏠리면서 부부관계까지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거야. 설마 뭐 그렇게 까지 되겠냐 싶지? 근데 말야. 바로 이 패턴이 이 시대 대한민국 워킹맘들이 겪고 있는 공통적인 딜레마라면 믿어져?
내가 승진을 목전에 두고 휴직이라는 선택을 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을거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대론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는 위기감’이랄까? 내 경우엔 ‘생계수단으로서의 일’, ‘나날이 간절해져가는 꿈’, ‘점점 더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가정(아이)’라는 세 개의 공으로 하는 아슬아슬한 저글링을 견딜 수가 없어진거지. 이대로 가다간 세 공을 모두 다 놓쳐버릴 것 같았거든.
휴직을 하고 내가 했던 일은 세 개의 공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었어. 어차피 욕심낸다고 다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최소한 무엇을 취하고 버릴지는 내가 선택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편지들은 1년 반에 걸친 치열한 탐색에 대한 결과보고서인 셈이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주 편안해졌어.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게 되었거든. 지나고 보니 내가 힘들었던 본질적 이유는 ‘삶의 의미와 목표, 또 그것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더라. 물론 현재의 결론이 유일무이한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걱정은 안 해. 지난 1년 반의 노력으로 최소한 ‘바르게 질문하는 법’을 익힐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질문만 제대로 나와준다면 답은 또 찾으면 되는 거잖아?
육아가 어렵다고 했지? 맞아. 한 생명체를 키워낸다는 게 쉬울 리 없겠지. 당신 덕분에 온전히 1년 반을 공부했지만 이 분야에 관해서 만큼은 나도 뭐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고. 하지만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어떤 아이로 키우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어.
‘어떤 아이로 키우고 싶은가?’ 이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라구? 완전 동감이야. 그치만 나름 희망적인 메시지도 있어. ‘어떤 부모도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자식에게 줄 수는 없다.’는 것. 그게 뭐가 희망적이냐구? 생각해 봐. 우리가 살면서 해 나가야 하는 과업중에 특히 ‘育兒’를 어려워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익숙치 않다는 두려움과 뭔가 과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부담인데 아이를 키우는 育兒가 자기 스스로를 키우는 育我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잖아. 내가 일, 꿈, 아이 이렇게 세 개로 나눠들고 허덕대던 공이 실은 셋이 아니라 하나였다니 엄청 반가운 이야기 아냐?
진정한 자녀교육은, 부모가 바삐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에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배운 다음, 나중에 반대로 할까, 모방할까를 결심한다. 대개 부모는 어느 쪽이 옳다고 딱히 확신하지 못한다. 부모가 항상 아이들의 본보기가 될 만한 이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 중에서
당연한 이야기를 왜 이렇게 어렵게 하냐구? 내가 그 당연한 이야기를 이리도 길게 풀어쓴 이유는 당신의 편지에서 아빠로서의 죄책감을 읽었기 때문이었어. 나는 누구보다 잘 알거든. 당신이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려고 얼마나 애쓰는지를.
내가 굳이 ‘아빠로서 사랑받을 권리’를 환기시킨 것도 당신을 탓하고 원망하려는 게 아니고 당신이 원하는 좋은 아빠되기가 걱정하는 것만큼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어. 더구나 당신처럼 실행력이 강한 사람이라면 ‘당신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다시 말해 ‘스스로의 삶의 의미와 목표’를 좀 더 명확하게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
‘아이들에게 사랑받을 권리’를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은 아이들을 특별히 신경써 달라는 뜻이 아니야. 오히려 다른 어른들을 대하듯, 또 우리 자신을 대하듯 한 사람의 가치있는 인격체로 존중하자는 거지. 내가 당신에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의 질을 높이라고 한 이유도 당신 스스로 아이들이 ‘온전한 인격체’라는 것을 체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야. 직접 느끼고 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이들을 존중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이것만 되면 다음은 부모 자신이 스스로의 삶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교육이 되지 않을까? 어때? 이렇게 정리해놓고 나니 育兒가 훨씬 해볼 만하게 느껴지지 않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