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허름한 청바지에 백팩 차림인 스스로가 지겨워졌다.

뜨거운 20대의 키워드, 닥치고 '안정'

by 아난다

대학을 준비하던 시절엔 멋진 법관이 되고 싶었다. 법관이 되기 위한 꿈을 향해 서로를 격려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쳐나가는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삶이 너무나 근사해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행히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법관이 뭐하는 건지 이런 것은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차선책이라는 게 없었다는 건 어쩌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2․3지망이라는 용어를 원서를 쓰던 날 처음 알았으니 깊이 생각했을 리가 없고, 담임선생님과의 개인면담전에 모여앉아 수다떨던 친구들의 거수로 결정된 신문방송학과를 2지망난에 채워넣었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덕에 2지망이라 해도 나쁠 것 없는 결과였지만, 난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법학과에 재도전하기 위해 재수를 선택했다. 그런데 재수의 명분이었던 법관의 꿈은 수험생활을 하면서 점점 희석되어갔다. 내가 법관이 되고 싶은 이유가 단지 뭔가에 몰입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즐거운 기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법관이 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하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극도의 몰입상태를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하는.


그러나 재수라는 극약처방을 써가면서까지 구하던 ‘즐거운 몰입’은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아빠의 병중에 우겨서 시작한 재수생활이라 중도에 그만둘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1년을 다 채우긴 했지만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실패였다.


원래 다니던 대학으로 돌아와서 나름대로 적응을 위해 애쓰면서도 딱히 뭘 하고 싶다던지, 뭐가 되고 싶다던지 하는 생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저 막연히 작가가 멋져 보이기도 하다가, 한때는 개그맨 콘테스트에 나가보기도 하고, 친구들 따라 방송국 시험도 봤지만 특별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뭘 해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 숨 막히는 시간들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여전히 고3때 자신에게서 확인한 저력에 대한 막연한 믿음뿐이었다.


복학을 하고도 2년이 넘도록 주어진 수업을 챙겨 듣는 것조차 버거웠다. 정말 물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지각과 결석을 일삼았으니 성적은 간신히 학사경고를 면하는 수준이었다. 아빠의 병으로 얻은 장학금의 최저 학점기준인 2.5를 넘기지 못한 학기가 두 학기나 된다. 지금 생각해도 아빠에게 너무나 죄송스럽기만 하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요즘도 시험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강의를 신청했었지하고 허둥대는 꿈에 시달릴 정도니 그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었던 것 같다.


내가 달라진 것은 대학 3학년 겨울방학때 부터였다. 아빠가 병으로 직장을 나오신지도 3년이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여차저차한 이유로 지방에서 방학을 보내게 되었는데, 마침 그 지방에 아빠의 고교 동창이 계셔서 그분 딸의 공부를 봐주면서 그 댁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빠의 공주였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공주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착각이었다. 내가 아빠의 공주인 것은 변함이 없었으나 아빠의 왕국은 이제 과거의 영화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아빠 친구의 부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전과 다름을 느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우리 아빠의 백이 되어드려야 하는구나! 내가 흔들리면 우리 집을 지켜줄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관심의 80%는 아빠의 땀과 희생에 대한 보상이었구나. 아빠가 벌어놓으신 사회적 자산은 이미 바닥나고야 말았다. 이젠 내가 벌어서 아빠를 지켜 드려야 한다!’


그 이후 나의 대학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2점대에서 4점대로 뛰어오른 학점은 오히려 변화의 아주 미미한 일면일 뿐이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부족한 학점 채우기와 일본어 공부로 채워졌다. 특히 일본어는 내게 새로 발견한 신세계였다. 학교의 영상도서관으로 등교해 일본 드라마와 영화 속에 빠져있다가 짬짬히 수업을 들어가는 식으로 생활이 꾸려졌다.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순전히 일본 대학원으로 교환학생이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취업을 위한 준비가 철저하기 못했던 탓에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계산도 있었던 것 같다. 결국 그렇게나 원하던 일본 교환학생 시험에 합격하고 대학원 1년을 일본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 와중에 무리해서 영어공인 점수까지 만들어 놓았던 걸 보면 어딘가 취직은 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일본어와 영어가 가능해지면 취직에 좀 유리하겠다는 판단도 했던 기억이 나니까.


일본으로 떠나면서 3년반이나 지속되던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접었다. 아니 일본행을 결정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분명한 의사표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와 사귀던 시절 집안형편은 급속도로 어려워졌다. 세계적 불황의 여파가 우리집만 피해갈 리 없었던 거다. 아빠가 하시던 사업에서 내리 사기를 당하시면서 감정적으로도 흔들리기 시작하셨다. 엄마도 알콜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셨다. 그야말로 집안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일본으로 떠나기 위한 서류상의 재정보증을 할 이천만원을 만들지 못할 정도였다.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고 했다. 엄마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꼭 유학까지 가야겠냐고 애원하셨지만 나의 태도는 완강했다.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나까지 무너지면 우리집은 끝장이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경제상황도 있었지만, 나는 사회에 나갈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이대로 나가 정착하는 데서부터 인생을 끌어간다면 그 길이 너무 고생스러울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 점에선 아빠도 같은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빠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일본에 보내려고 애를 써주셨다.


둘째 이대로는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교외에 있던 집에서 나온 것은 단지 학교가 멀기 때문은 아니었다. 집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아빠 엄마의 사는 모습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이렇게 상반되는 이유를 가지고 나는 모질게도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운이 좋았다. 우선 연구실 배정부터 그랬다. 교환대학이었던 와세다에 신문방송학과가 없어서 나는 별수 없이 다른 연구실을 택해야했다. 내가 하라다케시 교수의 연구실로 간 것은 순전히 그가 마이니치신문 기자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완전히 낯선 환경인 일본에서 나는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디자인할 수 있었다. 내가 꿈꾸는 캐릭터로 살아보고 싶었다.


‘유복한 집에서 곱게 자란 재능 있고 심성착한 아이’가 내가 추구했던 컨셉이었다. 일본에 오기 전 빠듯한 형편에 독기로 적금을 부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여기에 뜻하지 않은 장학금까지 받게 되어 아르바이트 없이도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현지인과 외국인들을 사귀고 싶었다.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가을에 있었던 교환학생 선발시험 이후로 영어공부와 대학원 수업 따라가느라 6개월가량 일본어연습을 거의 못한 상황이었다. 바쁜 동료들의 시간을 더듬거리는 내 말을 해독하는데 쓰게 하는 게 미안했고, 혹여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가까이 하기가 부담스러웠다.


1달 정도 지났을 때, 이게 아니다 싶었다.‘ 이럴려면 뭐 하러 어렵게 여기까지 온 거냐?’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지만 대답은 궁색하기만 했다. 드라마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 스스로 드라마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1년엔 사람을 담을 거라며 일부러 책 한권도 챙겨오지 않은 나였다. 거절당하면 다시 시도하면 되고, 오해를 받으면 풀면 되는 것이다. 드라마가 별건가? 그 과정이 드라마라는 결론이 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선 동료들을 기숙사로 초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학교근처 외국인 기숙사에 살고 있었는데, 관리인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깨끗이 치워놓기만 한다면 공동키친에서 파티를 해도 된다고 했다. 라면도 못 끓이던 나였다. 하지만 인터넷을 뒤지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이래저래 전도 부치고 김치찌개도 끓였다. 초대한 5명중 3명이 와주었다.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마당에서 하나비도 하고..서먹서먹하지만 좋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그들을 다시 보니, 오히려 더 어색했다. 친한 건지 아닌 건지 나도 헛갈렸다. 한국말로라면 얼마든지 자연스러웠을 상황인데..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감이 없으니 참 난감했다. 괜한 일을 했구나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훌륭한 시작이었다.


유학1.JPG


그들은 애니메이션과 트렌디드라마로 배운 나의 서툰 일본어를 재미있어 했고, 환대받고 있다는 확신에 나는 점점 내 페이스를 찾아갔다. 필드워크가 많은 연구실의 특성도 내가 좀 더 편하게 그들과 섞이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한국에서 환경저널리즘을 공부하러 일부러 유학 온’ 나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즐기시는 교수님의 개인적인 배려까지 겹쳐 나는 일본학생들보다 더 많은 공식행사에 교수님과 함께 참석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유학2.JPG


그 결과, 외국어를 쓰는 환경에서도 내 캐릭터 그대로 그들과 어울리며, 진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그 중 한 친구와는 거의 매일의 동선을 함께 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며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있어서 나는 일본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중 한 친구는 내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는 그 시절 또래 친구들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안정감을 주었다. 안팎으로 심하게 동요하던 그 시절, 내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면 80%는 그의 공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성공이었을 텐데 일본은 나를 위해 또 하나의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구실 유일의 한국 유학생으로서, 그것도 교환학생 신분으로 연구실의 메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할 수 있은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런 기반도 없는 곳에서 조직과 사회에 기여하면서 제 자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참 자랑스러운 소중한 기억이었다. 아마도 이때 느꼈던 만족감이 이후 내 삶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스스로의 기쁨으로 세상을 기쁘게 한’ 전형적인 사례일테니까.



일본에서 돌아올 무렵 연구실 동료들이 마련해주었던 송별회를 잊지 못한다. 신주쿠 하얏트 스카이 라운지에서의 정찬, 레인보우브릿지 드라이브, 오다이바의 깜짝 하나비. 그들은 한국이라는 왕국에서 온 공주 박미옥을 마음을 다해 송별했다. 마음을 다해 그녀를 보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날 우아한 소공녀 박미옥은 오다이바의 바다에 취해 생을 마감했다.



학과 공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일본교환학생 기간 탓에 체계적으로 논문을 준비하지 못했던 탓이었을까? 허겁지겁 면피용 논문을 쓰느라 많이 힘이 들었다. ‘스스로를 유혹하지 못하는 주제’에서 24시간 자유로울 수 없는 공부가 마치 형벌처럼 느껴졌었다. 공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빨리 취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나이 스물다섯, 한창 좋을 나이에 항상 허름한 청바지에 배낭차림인 스스로가 지겹기도 했다. 모질게 말고 무난하게 살고 싶었다. 그냥 적당히 해도 별 무리없이 해낼 수 있는 정도의 직업이면 좋다고 생각했다. 일본으로 떠날 때의 각오를 생각해 보면 참 무책임한 발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나는 지쳐 있었다. 아니 그냥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나고 보니 일본으로 떠나야 하는 이유로 내걸었던 첫 번째 사유는 그저 맘 편하기 위해 끌어다 붙인 대외설득용 명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내 공부를 지겨워했다. 아빠마저도 어디라도 좋으니 아무데라도 들어가라고 하실 정도였다. 특별히 시험이 필요하지 않은 작은 기업에나 들어가 볼까하고 여기저기 원서를 내보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군데도 오라는 곳은 없었다. 딱2주를 집에서 빈둥거렸더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 현재 직장의 직원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왔고, 워밍업 삼아 시작해 보자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왔다 갔다 했다. 제대로 준비하자면 1~2년은 기본이라는 시험이 딱 한 달 남아있었다. 떨어져도 억울할 것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 편히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시험에 붙었고 집안에선 참으로 자랑스러운 장한 딸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셔서 다른 생각은 할 여지도 없었다.




이 글도 역시 연구원 과정중에 썼던 Me-Story(삶의 한 가운데에서 쓰는 개인사)의 일부야. 대입에서부터 취업까지의 이야기인데, 써놓고 보니 한마디로 딱 ‘진로탐색기’더라.


근데 신기하지 않아? 세상속의 내 자리를 찾기 위한 9년간의 모색 기록에 ‘작가’라는 단어가 딱 한번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 말야. 그것도 아무 생각없던 대학시절 ‘막연히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한번 해볼까?’하다 말았던 게 다였으니 '작가'를 꿈꿨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긴 하지?


그렇다면 이 글은 ‘왜 작가가 되고 싶냐?’는 현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부적합한 게 아니냐구?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긴 글을 굳이 데려온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당신도 느꼈겠지만 내 진로선택의 키워드는 ‘안정’이었어. 적성이나 재능, 기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들을 제대로 탐색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또 혹 있었다고 해도 그 결과를 현실에 반영할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고 할까.


물론 나도 대학에 들어가서 한참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가?’ 하는 질문에 빠져 살았던 것도 같아.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라곤 고작 그때까지의 내 경험뿐이었고, 당연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을 수 없었지. 당황한 나는 ‘대학’이라는 누구나 다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의미를 추구하는 재미에 행복했던 ‘고3’시절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아.


그렇게라도 도망치지 않고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하루하루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야. 돌이켜 보면 그때 받았던 질문을 좀 더 치열하게 파헤쳐 대답을 얻었다면 같은 함정에 다시 빠지는 바보 같은 소모는 없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 해석이고, 당시의 나는 이런 대책없는 질문을 붙들고 있다간 인생이 영영 꼬여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견뎌내기엔 너무 어렸었던 것 같아.


잠깐이었지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재수에 실패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다음이었어.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지. 한번 책상에 앉으면 대여섯 시간은 어렵지 않게 앉아있던 나였는데 어찌된 것이 정말 수업시간 50분을 버티기가 힘든 거야.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었지.


어떻게든 그 시간 강의실에 앉아있기 위해서. 당연히 주로 술술 읽히는 소설류였지. 학교도서관까지도 가기 귀찮아 집 앞 책 대여점에서 빌려 읽었어. 그러다 만난 작가가 이외수. 그는 내게 작가의 삶에 대한 동경과 포기를 동시에 안겨준 인물이었지. 작품에 나타나는 그의 정신세계에 빠져들면서도 현실에서 보여지는 그의 奇行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거야.


예술가는 꼭 저렇게 힘들게 살 수 밖에 없는 걸까?



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아쉬움을 접고 ‘세속인’의 삶을 선택해야 했어. 그리고 그때부터는 철저히 다수에 편승하는 삶을 살았지.


사람들이 모여드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야.
여기 너보다 덜 똑똑한 사람이 어디 있니?
괜히 어줍잖게 생각따위를 해보겠다고 기를 쓰지 말고
잘 모르겠으면 그냥 사람 많은데 줄서.
그러면 적어도 시간 아낀 만큼은 빨리 갈 것 아냐?


가 차마 사람들 앞에 내놓지 못하고 혼자 몰래 간직하고 있던 내 삶의 모토였으니까. 그게 설마 내 영혼의 주권을 포기한다는 선언인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


내가 그래도 ‘책임감’ 하나는 있는 모양이야. 수업시간에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철딱서니가 ‘아! 이제 내가 우리 가족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하는 각성을 한 이후 그렇게나 빠릿빠릿해졌던 걸 보면. 책임감에 위기감까지 더 해지자 더더욱 조급해졌던 나는 점점 더 ‘현실적인’ 인간이 되어갔어.


헤진 청바지에 배낭을 메고 어수선한 집을 나와 도서관으로 향하던 스물여섯 박미옥의 꿈은 오로지 안정적인 직장과 평화로운 가정뿐이었지. 이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그 치열했던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이미지 출처 :https://www.pinterest.co.kr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