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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n greene Nov 28. 2023

유니콘인줄 알았던 어른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던데.. 마당발 친구 덕에 강남에서 스타트업 대표님을 만났다.


1. 중년미


글로벌 IT회사에 20년을 근속하시며 임원까지 오르신 그는, 3년 전 퇴사 후 학업과 사업을 병행하시며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고 한다. 현재 하시는 일과 향후 계획을 말씀 주시면서, 또 그것들이 자신의 과거와 어떻게 인과관계를 갖는지도 짚어주셨다. 자신의 일대기를 짜임새 있고 흡입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셨다. 만나보면 알 거라던 친구의 호언장담이 납득됐다.


‘그럼 이제 본인 이야기 해보세요. 궁금하네요^^’


이런 유형의 분들은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상대의 답변 수준/깊이를 보고 본능적으로 체급을 파악하는 것 같다. 종종 이런 분들을 만나면, 어찌할 도리 없이 어버버 하다가 끝난 적이 종종 있었다.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왜 그 일을 하고 계세요?’ ‘물은 왜 100 도서 끓죠?’


‘아.. 그.. 제 생각은…’


침착히 나에 대해 조곤조곤 말씀드렸다. 중간중간 ‘~에 대한 의견은 어때요?’ ‘~는 왜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시죠?’ 위협적인 질문을 몇 개 받기도 했지만, 임기응변과 친구의 서포트로 밑천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의 눈을 보면 상대가 나를 어찌 여기는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다. 내게 관심이 없는지, 경계를 하는지, 호감이 있는지 등. 근데 이 분은 단 한순간도 나를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센서로는 감지하지 못했다. 상투적인 표현에도 위트 있게 받아주셨고, 낯선 분야에 대한 투박한 생각을 하나의 질문으로 빚어가는 과정도 묵묵히 기다려 주셨다. 어린아이가 경청의 정의를 묻는다면 해당 장면을 교보재로 쓰고 싶을 정도다.


과하지 않은 추임새와 아이컨택, 적절한 정적의 배치까지, 사회생활 20년 이상 하시면서 길러진 스킬이신지, 진심 어린 공감이셨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중년 남성이 때로는 미소년보다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2. 공리주의자


말죽거리에 위치한 고깃집으로 이동해 소주를 마셨다. 그분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셨다. 정확히는 좋은 사람을. 그래서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게 곧 자신의 행복이라며, 좋은 사람들을 알아갈수록 행복할 일 밖에 없을 것이라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말씀하셨지만,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현인의 모습도 오버랩되어 보였다. 그러니 그대도 어서 행복하라고 호탕하게 웃으셨다.


교과서에 개념으로만 등장했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자가 바로 이런 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눈앞에서 당신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라는, 플러팅을 당하고 나니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바로 휴대폰을 꺼내 ‘네 행복=> 내행복’ 메모를 했다.


50대에 이르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걸 듣는데, 갑자기 눈에서 무엇이 흐르려 했다. 소주 2병 정도 마셨을까. 친구가 주책이라 눈치를 줬지만, 흐르지는 않았으니 ‘1 글썽 거림’이라 정의하고 있다. 내 글썽거림을 눈치챘는지 고깃집 사장님도 잔을 들고 합류하시더니, 여자 혼자 지금의 업장을 일구고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주셨다. 화장실 가려 뒤돌아 일어서니 손님들이 고기 안 먹고 서서 이야기만 듣고 있더라. 확실히 진솔한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처음에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품격을 느꼈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본인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 확신, 소신과 철학을 토대로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것이 존경스러웠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자식들이 하루하루 인생을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 매일 아이들에게 엄지를 들고 Enjoy라 외치고 출근한다고 하셨다. 어린 그 친구들은 아직 모를 테지만, 먼 훗날, 인플레이션에도 영향받지 않는 소중한 자산을 본인들이 일찍 상속받았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날의 대화와 웃음, 글썽거림도 점차 옅어질 것이다. 망각은 늘 그렇게 좋은 기억에도, 나쁜 기억에도 무차별적으로 작동한다.


그저, 소란한 일상 속, 머릿속으로나마 어렴풋이 그리던 존재가 다른 시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음이, 괜스레 반갑기도 하고 소소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나의 유난스러움인가, 취기로 인한 의미부여인가.


어른.. 어른.. 내가 되고 싶은 어른의 모습은 무엇이었더라.


얼른 집 가서 오버워치나 한 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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