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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은 녹두전 아니겠니

비와 빈대떡 냄새는 서로 섞여 그리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다. 투두 두둑 투두 두둑 하얀색 반 투명 일회용 우산 위로 수백 알의 빗방울이 무심히 떨어진다. 신고 나온 슬리퍼의 엄지발가락 부근께로 빗물이 폴짝폴짝 슬리퍼 위로 올라탄다. 습기가 차 오르고 찝찝한 느낌이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 사이로 스며든다. 슬리퍼가 벗겨지지 않도록 엄지와 둘째 발가락에 살짝 힘을 주어 걸음을 옮겨본다. 한걸음 또 한걸음.


 갑자기 난관을 만났다. 우리나라 지도처럼 빗물이 고여있다. 양 옆으로 넓게 퍼져있어 돌아가기도 애매하다. 살포시 뒤꿈치를 들고 왼쪽 앞발에 힘을 주어 고여 있는 빗물 중 가장 얕은 곳을 공략해 본다. 슬리퍼에만 빗물이 닿고 발가락은 온전히 마른 상태를 유지해보기를 기대하며 왼발을 지지대 삼아 오른발로 훌쩍 빗물을 뛰어넘어 본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슬리퍼의 스펀지는 푸욱 꺼지며 왼발가락이 반쯤 물에 담겼다 빠진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이런 젠장. 이러려고 이렇게 심혈을 기울인 것은 아닌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회용 우산의 알루미늄 대를 타고 빗방울이 흘러내린다. 발가락의 찝찝함과 우산을 받치고 있는 오른손. 그중에서도 우산대를 거머쥐고 있는 엄지 손가락과 두 번째 손가락 사이로 고인 빗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 사이로 흘린 빗물이 스며든다.


 아. 비 오는 날의 찝찝함이여. 그래도 이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향하는 이곳. 이곳에서 판매하는 그것 때문이다. 가게 앞엔 낡은 나무 데크가 있다. 나무 데크는 흠뻑 젖어 짙은 암갈색을 띠고 있다. 그 위로 빗물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알알이 맺히고 있다. 스스스스스 스스스스스 툭툭 투두둑 툭툭 투두둑 경쟁하듯 빗물들이 떨어진다. 나무 데크에 올라서니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나무가 위아래로 요동친다. 나무의 삐걱임과 빗소리는 적절한 화음을 만들어 낸다. 제법 들어줄 만한 소리이다. 나무로 된 문을 열자 우측 상단에 달린 풍경이 딸랑딸랑거린다. 딸랑 딸... 랑 따... 랑 소리가 잦아들며 문이 닫힌다. 문이 닫히자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진다. 비의 웅성거림이 순간적으로 멎고 시끌벅적한 동네 아저씨들의 소리들이 들린다.


 "야 뭐 먹을까."

 "뭐먹긴 비 오니까 빈대떡에 막걸리 먹어야지."

 "그러니까 무슨 빈대떡?"

 "고기 녹두 빈대떡 먹자고..."

  얼굴이 검고 주름이 간 아저씨 한 명이 조금 큰 목소리로 주인을 부른다.


 "아저씨 여기 고기 녹두 빈대떡 하나 주세요."

 "네네...."


 이런. 앞에 이 아저씨 무리를 포함해 두 명이나 기다리고 있다. 역시나 비 오는 날 전집은 초 저녁부터 활기차다. 좀 일찍 가면 나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두 명이나 주문이 밀려있다니.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 젠장. 앞에 하노명이 '모둠전'을 주문했나 보다. 모둠전은 여러 가지 재료들로 구성된다. 버섯, 두부, 해물 동그랑땡, 김치 등등. 아무리 맛이 없거나 싫어하는 재료들도 전이나 튀김으로 만들면 다 맛있다. 모둠전도 그러하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음식들도 전으로 부쳐서 간장에 찍어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하지만 조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일반적인 녹두 빈대떡은 반죽을 척척 휘휘 저어 철판 위에 기름을 휘리릭 두르고 반죽을 얹으면 끝이 나지만 모둠전은 손이 많이 간다. 각각의 식재료들을 하나하나 반죽을 입혀 구워야 한다.



 이윽고 주인이 철판에 기름을 두르고 옆에 한가득 쌓아놓은 재료들을 올리기 시작한다. 기름에 전이 구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지글지글지글지글. 그것은 빗소리와 닮아 있다. 그래서인지 비 오는 날 전집은 항상 북적인다. 사람들은 비와 빈대떡 굽는 소리의 청각적 감성에 동화되어 가는 것일까. 얼마가 지났을까 조금씩 조금씩 모둠전이 익어간다. 자글 자글한 기름 소리 사이로 고소하고 입맛을 자극하는 전의 향기가 코끝으로 달려든다. 맛있네 맛있어. 먹지 않아도 먹은 듯 식감이 느껴진다. 중독성 강한 전 냄새는 미각을 자극한다. 킁킁 코를 벌름거린다. 주인이 계속 전을 뒤집는다. 일반 녹두전이라면 한 두 번씩만 뒤집으면 될 것을. 모둠전은 수량이 많다. 그래서 계속 뒤집어야 한다. 뒤집고 뒤집고 뒤집고 그러기를 수십 번. 드디어 모둠전이 완성되었다. 앞의 손님은 카드로 계산을 하고 모둠전을 쥐고는 문을 열고 총총총 사라져 버렸다.



 됐다. 드디어 내가 시킨 해물 녹두 빈대떡이 시작되는구나. 기존에 모둠전을 조리했던 철판은 딱 익기 좋게 달구어져 있다. 그래 처음보다는 이렇게 달구어져 있는 철판이 그 맛을 살리기 더욱 좋을 것이다. 적당히 달구어져 있는 철판 위로 주인의 기름 춤사위가 벌어진다. 기름이 춤추듯 철판 위를 가로지르고, 묵직한 녹두 반죽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츠르르르.. 그 소리는 모둠전보다 훨씬 크다. 덩치가 큰 놈인지라 철판에 닿는 면적이 커서 그럴 것이다. 뒤집개로 몇 번 뒤집으니 해물과 녹두와 채소의 완벽한 궁합을 띈 그놈들이 노릇노릇 익어간다. 그렇지 바로 저 색깔이야. 녹두전은 너무 익히지 않으면 그 두께가 두꺼워 속이 설익을 수 있다. 또 너무 익히면 겉이 타버려 제대로 된 해물 녹두 빈대떡의 맛을 느낄 수 없다. 그저 그것은 적당히 '노릇노릇'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익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거의 완성 직전 몇 번을 뒤집자 드디어 해물 녹두 빈대떡이 완성되었다.


 이제 포장을 해야 할 차례다. 주인은 녹두 빈대떡을 절대 랩을 치지 않는다. 랩을 치게 되면 수증기 때문에 빈대떡의 바삭바삭한 맛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랩을 치지 않은 녹두 빈대떡은 집에 가져가서 먹더라도 그 바삭바삭한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봉지를 열어 보니 녹두 빈대떡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김 사이로 먹음직스레 잘 익은 오징어 다리가 삐죽이 나와있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와 빈대떡 냄새는 서로 섞여 그리움의 냄새로 바뀌고 있었다. 그립다. 그리움이 밀려온다. 무엇에 대한 그리움일까. 알아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항상 그리움을 먹고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에 사람들은 빈대떡을 먹는다. 그리움을 먹기 위해 우리는 나무젓가락을 손가락 사이에서 비벼서 빈대떡을 찌른다. 빈대떡을 한 점 집어 간장에 푸욱 찍어서 한 입 먹으면 입안에 그리움이 그득 쌓인다. 아 봄비구나.


 그렇게 비가 오는 날은 그리움을 기다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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