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
어릴 땐 그다지 꿈이 없었다. 주변 몇몇 치들이 어릴 때부터 확고한 자신의 꿈을 가지고 무언가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신기해 보였다. 그렇게 중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에 들어갔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대단한 판검사가 되겠다는 소망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종종 높은 비율로 꾸준히 장학금을 타곤 했으니까. 그러다 졸업을 하고 군대를 장교로 갔다 오고 20대가 다 흘렀다.
30대가 되었다. 20대 말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엉덩이 싸움이라는 공무원 공부를 나는 잘 하지 못했다. 좀이 쑤셔서 오래 앉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공무원에 대해 딱히 열망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법학을 전공했고, 조금은 익숙한 단어들이 있으니 막연하게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2년여를 공부했지만 시험에 합격할 수 없었다.
공부에 지친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에 빠졌다. 더 이상 공부하기는 싫었다. 지치기도 했고 더 해봤자 가능성이 없을 것이 뻔했다. 전환이 필요했다. 무엇을 하던 지금의 삶과 완전히 반대되는 라이프스타일이 필요했다. 그러다 생뚱맞게도 과일장사를 배우러 갔다. 거기서 장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웠다. 하루 평균 15~16시간을 일을 했다. 과도한 시간이라 생각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구조였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1년 반 정도의 시간을 경험하고 그만두었다.
지침.
당시 내 삶을 규정짓는 단어였다. 공부에서도 이미 지쳤고 몸을 혹사해가며 일했던 장사일도 나를 완전하게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지친 나는 시골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율적 결정이었다기보다는 삶에 밀려난 타의적 떠밀림이었던 것 같다. 당시 시골에 친구 녀석이 있었다. 가진 것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리고 내내 쉬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평상에 누워있다가 밥 주면 밥 먹고, 비 오면 초가삼간에서 비를 보며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들고, 밤에 눈이 떠지면 밖에 나가 만개한 별도 보고.
그러다가 마을 위원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당시 '로컬푸드직매장' 사업을 기획하고 있는데, 농산물 유통을 했었으니 도와줄 수 없겠냐는 제안을 해주셨다. 몇 개월을 쉬며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던 나는 그 제안을 수락했고, 그 시골에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컬푸드 직매장 사업은 우리나라에서 이제 막 자리를 잡던 시기였다. 지금이야 많은 지역과 농협에서 직매장 사업을 잘 운영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거의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매장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매장을 준비하다가 인연이 되어 수도권으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로컬푸드 직매장 사업에 몸을 담게 되었다.
30대 초중반은 이렇게 로컬푸드 직매장 사업과 관련된 삶을 살았다. 재미있던 점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매장을 준비하고 운영했던 경험 덕분에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전국에 관련 내용으로 강의와 컨설팅을 다녔다는 점이다. 그때 처음으로 강의에 대한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30대 중반부터는 사진을 직업으로 삼기 시작했다. 사진은 20대 때부터 관심이 있어 취미로 오랫동안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살긴 했다. 하지만 감히 직업으로 삼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우연찮은 기회로 매장에 들어오는 제품을 약식으로 찍어달라는 요청에 한 장 두 장씩 사진을 찍게 되었고, 그 경험들이 축척이 되며, 지금은 광고사진 스튜디오를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덕분에 광고사진 스튜디오는 벌써 8년째를 맞으며 내 인생에서 꽤 오래하게 된 직업이 되었다. 8년간 망하지 않고 잘 유지하고 있으니 40대는 또 이렇게 유지가 되어가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꽤나 여러 일을 했다. 하지만 미친 듯이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은 그닥 없다. 그냥 상황이 되니 했던 일들이 익숙해지고, 또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런 삶을 살아온 덕에 자기 개발서에 나온 분들처럼 고고한 뜻이나 명확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사는 분들을 보면 신기하다. 신기함이란 나와 다른 이에게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별 의미 없이 살아갈 뿐이다. 딱히 엄청나게 하고 싶은 것도 없다.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의미'는 '살아감'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의미'가 없다고 해서 '살아감'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자체에 이미 의미가 부여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내가 부여하지 않더라도 생명을 가진 모든 자연계에 부여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내 의미까지 붙여진다면 삶이 너무 무겁지 아니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불행하지 않으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