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모습이 부끄러웠던 선생님의 가정방문
국민학교에서는 학년이 새로 시작되면 ‘가정방문’이라는 것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통해서 가정환경을 파악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정 방문이 곤혹스러운 아이들도 있었다. 가난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가정방문은 엄청난 부담감이었다. 사는 형편을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보여 준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자기 집이 아니라, 조금 형편이 나은 친척집이나 아니면 이웃에 사는 다른 사람의 집을 마치 자기 집처럼 해서 연극을 하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부끄럽기도 했지만 말이다.
“오늘 가정방문하는 친구들은 수업 마치고 모두 남으세요.”
“예!”
며칠 전부터 가정방문은 미리 예고되어 있었다. 가정방문을 하는 날이면 집에 계시는 어머니들이 더 마음을 졸였다. 사는 모습이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오시면 대접할게 변변찮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들을 통해 가정방문을 받지 않으면 안 되냐고 물어보지만 그게 더 미안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고 계속 결석하는 친구는 물론이고 가정방문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가정일수록 더욱더 가정방문을 해야 하는 때였다.
부모님이 모두 일하러 나간 아이들은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시는 게 싫었다. 집에 오셔봤자 별로 보여 드릴 것도 없고 대접할 것도 없었다. 그런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그렇게 사는 것을 들킨 기분이었다. 그래서 가정방문을 어떻게든지 받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떤 아이들은 집에 있으면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미리 받은 집 약도랑 ‘가정 조사서’를 준비해서 아이들과 가정방문을 다니셨다. 가정 조사서에는 부모님의 직업, 나이, 가족 수, 관계, 집안 살림살이에 대해 표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텔레비전, 전화기, 피아노, 자동차, 라디오, 전축 등 집에 있는 것에 동그라미로 표시했다. 나는 부모님과 가족들에 대해서 나이와 관계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빈칸으로 비워둬야 만했다. 잘 사는 아이는 전화기도 있었고, 라디오도 있었고, 텔레비전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학급에서 반장이나 부반장을 뽑는데 거의 사용되었다. 특별히 공부를 잘하지 않는 한 반장, 부반장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집부터 가정 방문이 시작되었다. 먼저 집을 방문하는 아이는 앞장서서 마치 수행원처럼 길을 안내했다. 여학생들은 집을 보인다는 게 부끄러웠던지 얼굴이 빨겠다. 집에 들어서면 어머니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선생님을 맞았다. 마루에는 과일 접시가 정성스럽게 준비되어 있었고, 사이다나 환타 같은 음료수도 준비되어 있었다. 귀한 손님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선생님은 아이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빼놓지 않았다. 아이는 옆에 서서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러면 아이의 어머니는 선생님의 그런 칭찬에 연신 웃으시면서 “모두 다 선생님 덕분이죠.”하면서 모든 공을 선생님에게 돌리기 바빴다. 선생님은 아이를 칭찬하러 들리신 것처럼 보였다. 공부를 잘하고 모범적이고 친구들을 잘 사귀고 있다는 말 외에는 거의 다른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칭찬이 끝나면 선생님은 자리에 일어나셨다. 그럴 때면 부잣집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눈치 못 채게 선생님에게 흰 봉투를 슬쩍 양복 안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셨다. 그런 어머니들은 가끔 수업 중에도 선생님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앞에 친구 집이 가정방문을 마칠 즈음이면 그다음 다른 아이가 또 자기 집을 안내할 준비를 했다. 가정 방문은 그렇게 해서 정해진 순서대로 며칠 이어졌다.
가정 방문을 생각하면 유경주 선생님이 생각난다. 국민학교 3학년 때쯤 담임선생님이셨는데, 학교에서 오백여 미터쯤 떨어진 비탈길 옆에 어머님을 모시고 사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역시도 가나하였기 때문에 학교에 갈 때면 걱정거리가 있었다. 학교에 육성회비를 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내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 내일 육성회비 가져가야 하는데요.”
“얼만데.”
“육백 원요.”
“다음에 드린다고 말씀드려라.”
“예…….”
나는 차마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다음에 드린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정방문이 시작되었고 내 순서가 오고 말았다.
산동네 비탈길을 올라가시는 선생님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선생님을 뒤따라가는 아이들의 발걸음도 힘들어 보였다. 벌써 산동네 아래에서 여러 집을 방문한 뒤라 많이 지쳤던 것이다. 그래도 선생님은 우리들을 쳐다보시면서 빙긋이 웃으시기만 할 뿐 전혀 힘든 기색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어서 빨리 우리 집이 나타났으면 하고 생각했다. 집을 안다고 나 혼자만 빨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에 집으로 갈 때는 금방 갔는데, 그날은 왜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겨우 산동네 입구에 다다라서야 마침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넓은 평지에 우리 동네가 나타난 것이었다.
골목길을 몇 개 접어들자 우리 집이 보였다. 저만치 선생님과 아이들이 뒤에 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집 안으로 뛰어갔다.
“엄마! 선생님 오세요.”
“응?, 그래.”
어머니는 언제 준비해 두셨는지 사과 두 개와 사이다 음료수를 작은 쟁반에 담아 마루에 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생님을 맞이했다.
“아이고 선생님, 이 누추한 데까지 찾아주시고.....”
“어머니, 별말씀을요. 괜찮습니다.”
선생님을 보자마자 어쩔 줄 몰라해 하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는 선생님 옆에서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선생님은 나에 대해 말씀을 하시면서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다음 날 선생님은 나를 부르시면서 다음 달부터는 ‘육성회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육성회비를 면제시켜 주신 것이다. 육성회비 금액은 600원이었다. 당시 우리 형편으로는 600원도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육성회비를 면제받아서 선생님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다. 당시 많은 선생님들이 나와 같은 가난한 집의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많이들 도와주셨다. 어떤 선생님은 자신의 월급을 아껴서 쌀이며 연탄이며 사다가 학생들 몰래 집에 두고 가셨다. 그런 선생님의 고마운 마음이 시간이 지나도 오래도록 생각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학생들의 가정환경을 살펴서 교육에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되었던 가정방문이 부모님들의 ‘치맛바람’으로 더 이상 가정 방문은 하지 않게 되었다. 5월 15일 스승의 날만 되면 여러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아직 생존해 계시는 선생님을 한번 찾아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 본다.
지금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가정은 과연 어떨까?
우리는 그 아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