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Pieter Berghoef
얀 피터 베르게프는, 서른넷의 나이에 요절한 네덜란드의 작가입니다. sz85라는 분류명이 붙은 의자 하나만 그의 작품으로 남아있을 뿐, 어떤 삶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짧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피터의 아버지 J.F 베르게프는 기능주의 조립식 주택을 네덜란드에 처음 도입한 유명한 건축가로 네덜란드 인명 백과사전에도 나오는 분입니다. 자위홀란트 출신으로 네덜란드의 조립주택의 1/3 정도가 이 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어머니 젤레미네는 독일과의 국경에 가까운 즈볼러에서 태어난, 프로테스탄트 특유의 성실한 , 삶의 기풍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두 분 다 90세가 넘도록 장수하셨습니다.
여느 부모님들처럼 너무나 영민하나 꿈을 펼치지 못한 채 가버린 아이를 가슴에 묻고 사셨던 것 같습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J.F 베르게프는 얀 피터의 사망 후에는 이렇다 한 사회활동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얀 피터는 플랑드르의 화가 얀 피터 브뤼겔과 성만 다를 뿐 이름이 똑같습니다. 그가 디자인한 붉은 래커칠을 한 자작나무의 몸통 위에 덮인 검은 벨루어 의자를 보고 있으면, 브뤼겔의 그림에 보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움이 느껴집니다ㆍ
북쪽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방랑벽을 타고난다는 구절이 헤르만 헤세의 에세이에 나오는데, 단 한 작품뿐이기는 하지만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걸작을 남긴 얀 피터의 인생은 역시 노매드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틀림없이 아버지 쪽 조상이 살던 브뤼허와 됭케르크는 수도 없이 갔을 것 같습니다. 브뤼허 그 로닌 헤 미술관에 걸려있는 , 자기와 이름이 같은 피터 브뤼겔의 걸작들도 물론 봤을 것입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됭케르크 해변에서 북해를 지나 밀려오는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이제 막 유행하기 시작한 필름 카메라로 멋진 사진도 남겼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왠지 자기 얼굴을 찍는 것은 싫어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좋아했다면 어딘가에 그의 사진 한 장 정도는 구글에 나올 텐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60년대 유행했던 네덜란드 인기 작가 헤랄드 레베의 소설이나 토마스 만 혹은 헤세의 고전들도 읽었을 것 같습니다. 1960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마이스 데이비스의 전설적인 공연도 왠지 보았을 것 같습니다ㆍ
부풀어 오른 범선의 돛 같은 가슴으로 네덜란드의 옛 식민지였던 바타비아까지 여행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ㆍ
하지만 한 남자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이 세계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습니다.
사람도 물건도 살아있는 것을 그만두고 그 실재가 기억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의 완결성을 획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의 의자로부터 그의 짧았던 인생을 상상해 보는 것처럼요.
어제 황인찬 작가 시집을 읽는데,
사진관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이 사람 멋있네요.
죽었어요..
라는 시구에
슈바르츠발트의 검은 숲 사이로 난 길을 달려가던,
어느 날 저녁의 사진 같은 풍경과 함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새벽 예전에 같이 그리스로 여행했던 J 형이 무늬만 벤츠인 거지 같은 중고차를 타고 베를린에 나타났습니다 ㆍ
같이 차를 타고 여덟 시간을 달려 칼브에 도착할 즈음에는 조용히 내리던 눈이 폭설로 변해, 흰 눈의 고요한 엄숙함이 하염없이 안개와 함께 밀려들며 , 296번 국도를 따라 튀빙겐으로 가던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ㆍ
건축과 예술에 대한 무시무시한 인문학적 지식으로, 내가 알던 유럽을 소리도 없이 무너뜨리고 사라지게 만들었던 형은 눈이 특히 반짝였던 사람입니다 ㆍ
학생 운동하다가 감방에 간 세월, 십 년이 넘는 독일 유학생활 , 이천 유로를 주고 산 중고 벤츠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자부심을 합하면, 결국 그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꿈으로 세상을 살 수 없었던지, 너무 많은 술을 마셨고 너무 아파했고 먼저 갔습니다.
살아있다면, 이런 시대니까 책을 많이 읽고 싶어.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1975년 11월 6일 한델스 블라드 신문에 실린 얀 피터의 부고기사는,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위한 기도로 시작되어 길지 않은 가족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평온을 위한 기도는 흔히 알코올이 사인이 된 경우에 사용되는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ㆍ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으로 중요한 무엇인가를 삶에서 포기해버려야 하는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ㆍ 그걸 못하고 떠난 사람은 뒤에 남은 사람에게 숙제를 남깁니다 ㆍ
또 한 해가 갑니다 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