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자는 나무를 보고, 관리자는 숲을 본다
한 번 관리업무를 맛본 관리자는 실무자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물론 직군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직장인으로 오래 일하다보면 실무업무에서 관리업무로 승격 된다.
관리자는 더 이상 자잘한 일에 얽히지 않아도 된다.
실무자 업무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거나 의사결정하거나 사업의 방향성을 정하는게 그들의 주된 역할이다.
실무자가 없다면 사고가 되어 큰 타격이지만, 관리자가 없다면 당장 문제가 될 일은 없다.
이것이 관리자 역할에 있어 큰 함정이다.
회사 지시사항으로 담당하던 업무들이 통째로 협력업체(외주업체:다른 회사의 의뢰를 받고 업무를 진행함 / 보통 대기업이 중소 하청업체에 업무를 통째로 넘기며 업무수행에 대한 비용을 지급함)에 이관되었다.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사업장 업무이고, 본사 정규직원들이 이 업무를 진행하기에 위치(서울-경기)문제로 애로사항이 많아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던터였다.
몇년동안의 협력업체 발굴 및 심사기간을 거쳐 A 업체가 선정되었고, 20여명의 A업체 직원들을 새로이 맞이하게 되었다.
부담스럽게도 내가 이 사업의 안정화 역할을 담당하는 총괄자로 지정되었다.
A업체에서는 20여명의 직원들을 관리하기 위해 17년차 핵심인력 B를 관리자로 보냈다.
B와 협력사 직원들은 나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며 업무를 익혔고, 그들 모두 열과 성을 다해 적극적으로 임했다.
특히 업무사고가 터졌을 때, 직접 발벗고 뛰어다니며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관리자 B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밤 늦게까지 으쌰으쌰 힘을 북돋으며 직원들을 관리하고 가르치는 관리자B를 보며, 이 업체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
몇 달동안 나도 그들도 늦은시간까지 일하며 노력한 결과 사업 안정화는 성공적인 궤도에 올랐다는 평을 듣게 되었다.
잘 따라줘서 감사하다고 말할때마다, 그들 또한 내게 친절히 가르쳐줘서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사업이 안정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갑작스럽게 B의 퇴사소식을 들었다.
다른 회사로 이직한다는 B를 보며,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고 어딜 가시냐"고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협력업체 소속으로 회사가 다르기 때문에, B에게 어떤게 불만이었는지 자세히 묻는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A업체에서는 다음 관리자로 C를 보냈다.
C 또한 해당업체에서 17년차로 일해온 직원이었다.
B도 C도 사실상 A업체 직원 20여명을 이끄는 부서장(長)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C는 오랜기간 일한 경력자답게 업무능력이 꽤 좋았다.
오자마자 아래 직원들의 업무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듯했다.
밥먹으며 사담을 나누던 중 무심코 C는 이런 말을 했다.
"이미 다들 잘 하고 있어서 제가 딱히 어떤일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간혹 할 일이 없어서 조금 민망하기도 해요."
나는 겸손함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뭐 관리자역할이 그런거죠. 충분히 잘 하고 계세요."
C의 업무량과 업무수준을 파악해서도 안되었고, 멋대로 파악한걸 언급해서도 안되었다.
협력업체와 맺은 계약법상 감시로 비춰질 여지가 있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C 아래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이 내게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도 되겠는지 조심스럽게 연락이 왔다.
C에 대한 근태(근무시간), 업무량, 태도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본인들이 기록해온 C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해서 보내줬다.
- 출근 시, 잦은 지각
- 점심시간(1시간 지정) 2-3시간 사용
- 업무 중 필라테스 운동, 피부과 진료 등 개인용무
- 업무 중 오랜시간 자리비움
- 수시로, 갑작스러운 휴가 사용 잦음 → 연간 40개 이상 휴가 사용한걸로 판단됨
(10여명의 직원들은 연차를 관리하는 C가 본인 연차,반차를 본사에 제대로 보고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함)
- 업무 도움 요청 시, 도와줄 수 없다며 거절
자신들의 부서를 이끄는 장(長)을, 외주 맡긴 대기업 회사측인 내게 언급(고발)하는건, 그들 입장에서도 쉬운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들 회사에 아무리 이야기해도 들어주지 않는 상황이라며, 퇴사를 염두하며 내게 도움을 청한다고 말한다.
A업체에서는 직원 관리를 위해 C를 보냈던 터였다.
C 본인은 장(長)의 위치였으므로, 어떤 일이든 본인 손바닥 밑이었다.
(간혹 사업장을 점검하기 위해 방문하러 온 나에게, 본인의 오랜 경력을 살려 설명하는 능력은 뛰어났었다.)
C에게 이곳은 업무공간이 아닌, 그 누구의 감시체계도 없이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놀이터였다.
1년 가까이 본인 소속 20여명의 직원이 고생하는동안 C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세상을 구축해놓고 마음껏 뛰놀고 있었던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건 '관리자' 라는 직함의 함정이었다.
관리자라는 명목으로 C에겐 실무업무가 거의 없었다.
실무자 20명이 모든 일을 대행해주고 있었고, 업무사고가 나더라도 실무자들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말하며 본인은 개인용무 보는게 가능했던것이다.
협력업체 직원들의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또한 이런식으로 회사에 놀러다니는걸 방관할 수 없었다.
나는 C를 불러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 "C님, 요즘 보니 (A소속) C님쪽 직원들이 너무 고생하는것 같아서요..
몇 번 사업장에 늦은시간에 방문했는데 야근하고 있더라구요. 매우 힘들어하는것 같던데요.
혹시 아래 직원들 업무 일부를 받아가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C : "제가요..? 저는 관리자에요. 실무는 실무자들이 해야죠."
나 : "직원들이 힘들다고 퇴사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라고 들었어요.
(사실상 C의 근무태만 태도 또한 사기저하가 된다는 입장도 있으나 언급하지 않음)
지금이 제일 바쁠시기이니 한달만 도와주시는걸 요청드려요.
관리의 역할이 관리만 해당되지 않아요. 실무도 직접 해보면서 머리로만 알고있던 업무를 직접 배워보기도 하고, 어떤쪽에서 애로사항이 있는지 이번기회에 배워보면서 함께 수정해나가는건 어떠세요?"
C : "네... ? 저 관리자인데요.. 그리고 제 업무도 버거운 상황이에요."
나 : "죄송하지만 어떤 업무가 있는지 알아도 될까요? 지금 상황에서 저희가 외주맡긴일은 실무자들이 모두 처리하고 있는걸로 알아요"
C : "모든걸 다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저도 일이 있어요. 20명 직원들을 다 챙겨야하고..
저희 직원들 일 정말 많아요. 사람을 더 뽑아주시는걸 요청드려요"
나 : "예전부터 어떤 부분에서 많은건지 정리해보라고 말씀드렸는데, 자료 만든건 받아볼 수 있을까요?"
C : "제가 만들어야하나요?"
나 : "본인 필요에 의한 자료를 제가 만들수는 없잖아요. 계속 도돌이표처럼 인력부터 요구하시네요."
C : "저희 직원들 너무 힘들고 바빠요"
나 : "바쁘니까 도우라고 말씀드리는거에요"
..........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나 : "그럼 어떤 업무를 할 수 있는지 이번주까지 메일로 알려주시겠어요?"
C : "네...? 생각해볼게요"
나 : "C님.. 그냥 드리는 말씀 아니에요.
제가 C님이 할 수 있을만한 일들을 정리해서 메일 드릴테니, 반드시 피드백 주셔야해요. "
C는 황당하다는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를 대답했고, 결국 피드백은 없었다.
그렇게 협력업체 직원들을 이끄는 수장(長)의 태만함이 수면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자신이 이끄는 바로 아래 직원들에 의해서.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