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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트리 Aug 09. 2020

인생에서 가장 늦은 때

보내지 못한 편지

유치원 시절 도시에서 살다가 산과 들이 집 앞에 펼쳐진 시골마을로 이사가게 되었다. 


그 시골마을의 초등학교에 입학 후 만난 , 생애 첫 담임 선생님은 이상했다. 

언뜻 보기에 인상좋은 아줌마 담임이었는데, 입학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내 바로 뒷자리 여자아이를 대놓고 예뻐하고 늘 칭찬했다. 바로 앞자리인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가 싶었다. 

나도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 친구 행동을 똑같이 따라했고, 칭찬을 받고싶어 책상청소도 열심히 했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며 이것저것 무진장 노력을 해봤으나 선생님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상을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친구는 성실상부터 그림상까지 1등 대상을 휩쓸었고, 나는 못받거나 장려상에 그치는게 다였다. 그렇게 난 태어난지 8년차에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그 선생님은 대다수의 아이들에게 늘 신경질적이었으며 때리고 혼내는 감정학대를 일삼았다. 

나에게 학교란 공포와도 같았다. 담임이 화가나는 순간이면 내 심장은 무서움과 두려움에 쿵쾅쿵쾅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용실을 하는 그 친구의 어머니는 매일 학교에 와서 선생님에게 이것저것 공물과 뇌물을 바쳤다고 한다.      


2학년이 되어선 그나마 공포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나란 존재는 늘 여전히 선생님의 관심 밖이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학교에 가는 게 별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하기 빼기를 배운 순간부터, 8살의 나이에 학교라는 곳을 몇 년 더 다녀야하는지 가장 먼저 계산을 해봤고, 12년만 버텨보자는 결론을 내었다.     


또 어느덧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의 담임은 어여쁜 여자선생님이었고, 나의 담임은 할아버지 선생님이었다. 난 은근히 내 친구의 담임이 부러웠다. 그냥 젊고 예쁜 외모를 가진 사람이 담임이라는게 부러웠던것같다. 그 예쁜 선생님을 보다가 나의 담임선생님을 보니 늙수그리한 외모가 부끄럽고 초라해보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선생님은 날 참 좋게보신듯하다. 처음 뵙게 되었을 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드렸더니, 나를 똑똑하고 착하고 성실한 학생인양 대접해주셨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에게 관심조차 없던 전 담임들과 달리 굉장히 존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0년 인생을 살며 처음으로 자존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듯했다. 아니 자존감이 생겨났다. 나를 칭찬해주시고 아껴주시는 모습을 보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스스로를 발전시키려고 늘 노력했다. 친구들이 그런 나의 모습을 어떻게 보았는지 다수결 투표에서 처음으로 부반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게되었다. 초등학교 어린이가 학교(사회)생활에서 처음으로 받아본 관심과 칭찬은 분명 큰 힘이 되었던것같다. 두각이 안나타나던 공부도 곧 잘하게 되었으며, 달리기도 전교1등, 구구단 외우기 1등 .. 그렇게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3년차에 못하는게 없는 똑똑한 친구라는 주변의 평을 들을 정도였다. 

다른반 담임들이 각 반에 똑똑하고 아끼는 아이 한명씩을 칭찬할 때, 할아버지 담임선생님은 지지 않고 내 이름을 꺼내며 똑똑하고 착한아이가 우리반에도 있다고 자랑하셨다.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관심 밖의 아이였던 내가, 담임선생님의 자랑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과분했고 정말 감사했다.      


당시 방과후 컴퓨터를 배우며, 타자가 전교에서 가장 빠르다고 소문난 나에게 선생님은 워드업무를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그리 어려운일이 아니었기에 몇 일 동안 수업끝난 후 시간을 내어 도와드렸더니,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갖고 밀어주시는 느낌이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받아본적 없는 과분한 칭찬과 관심을 받으며 살았던 나의 10살 시절이었다. 그 때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이런사람도 되어볼 수 있다는걸 깨달았다. 어린이었음에도 어른으로부터 존중을 받을 수 있다는걸 알게되었다.      


사실, 할아버지 선생님을 담임으로 거쳐간 모든 아이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걸 안다. 당시 아이들의 인권은 언급되지 않는 시기였고 시골마을의 남자선생님들은 대부분 남자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행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초등학교 5학년이 되고, 난 다른지역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 선생님께 고마움이 늘 있었고, 몇 번 편지를 썼으나 나의 귀찮음 때문에 우체국에 붙이러 가지는 못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선생님을 찾아뵈어야한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어느날 문득 이런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도 할아버지 선생님이었기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선 안된다”      


교육청 사이트에서 스승찾기를 검색했으나 퇴임하셨는지 검색되지 않았다.

 몇 달에 걸쳐 당시 초등학교에 연락을 취했으나 너무 오래되어 정보가 없다고 했고, 교육청에서도 정보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연세가 당시에도 많으셨기에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간곡하게 매달렸다. 그러다가 2012년도 마지막 퇴임하신 초등학교 정보를 얻게 되었고, 그 학교로 연락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그 외의 정보는 더 이상 없다고 한다. 12년도 퇴직이라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조금의 희망이 느껴졌다. 바로 행정실에 전화를 해보았으나 이미 8년전에 퇴임하였고 너무 오래되서 이제 아는분도 없고 개인정보보호로 정보를 갖고있지 않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대로 끝이어선 안된다는 집념으로, 내가 생각한 방법을 알려드렸다. “그 학교에서 8-9년 이상 근무하는 선생님이 분명 계실텐데요.. 그분께 제 담임선생님의 안부를 물어봐주시겠어요? 연락처를 알려달라는게 아니에요. 제 이름 석자 알려드릴테니 전달만 해주시고 잘 지내시는지 안부만 물어봐주세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하고 끊은 전화기를 보며 이대로 제발 끝이 아니길 생각했다. 예상과 달리 10분만에 다시 전화가 왔다. “그 머리 많이 벗겨진 할아버지 남자 선생님 말씀하시는거 맞죠? 말씀 안드리려다가 알려드리는게 도리인 것 같아서요.. 듣기로는 이미 4-5년전에 고인이 되셨다고 합니다.”

 ... 어쩌면 예상은 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선생님을 18년이 지난 후 찾는다는게 나의 욕심일 수도 있겠다. 

그저 성인이 된지 한참 된 내가 진작 찾아뵙지 못한게 참 원망스러웠다. 

‘언젠가 찾아뵈어야지..‘ 라는 생각만으로 살아온 내 자신에게 또 난 자존감이 없던 10살 이전의 내가되어 말한다. 

‘네가 그럼 그렇지...‘

다만, 변명을 해보자면 정말 성숙해지고 세상을 더 잘 알아갈즈음 진심을 담아 뵙고 싶었다. 

인생에 늦은 때란 있구나... 

이 말만 수천번을 마음속에 묵히며 외치고 있는 날 본다.     

그렇게 난 또 하나를 배운다.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참 고마운분이 있었다면, 그 즉시 고마움은 꼭 표현을 해보자..!     


할아버지 선생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내게 만들어준 자존감은 1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를 지탱하고 있다. 힘들때도 지칠때도...     


고 김*하 선생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이젠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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