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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Mar 13. 2020

나이 들어감을 기대하며

오정희『시간의 얼굴』을 마주하다

 “아유, 이젠 나이가 들어서 못 하겠어.”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올 때면 깜짝 놀란다. 자연스레 내뱉은 말에 이미 시작도 못 해보고 진 기분이 들어서다. 나이가 들어서 밥 하는 것도, 청소를 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 사실이다. 가끔 계단을 내려오다가 시큰거리는 한쪽 무릎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언제부터 ‘나이 들어서’라는 말을 저항감 없이 쓰게 되었을까?

 오정희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 중『시간의 얼굴』이라는 챕터를 감탄하며 읽었다. 부모는커녕 몸담고 살아갈 사회와 국가도 선택할 권리도 없이 어느날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낸 글이었다.

 스무 살은 ‘다른 세상을 향해 열리는 문’(36)이라고 표현하고, 서른 살이 되는 아침을 ‘착잡하다’라고 묘사하는 문장부터 빨려 들어가듯 읽었다. ‘30대는 바쁘고 바쁘다는 것으로 충분히 풍요로운 나이’(37)라는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40대를 지나오며 30대의 바쁨 속에 활기로 충만했던 나를 다시 기억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능성과 체념의 틈바구니에서 안간힘을 쓰면서도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며 새로운 그러나 희망 없는 로맨스를 막연히 꿈꾸기도 한다.’(37)는 구절은 또 어떤가. 남편과의 갈등이 깊어질 때마다 ‘이혼’과 ‘독립’이라는 단어를 몰래 가슴에 품고 눈물을 삼키던 30대의 우울한 날들이 떠올라 마음이 저릿했다. 육아와 가사 노동에 내가 닳아 없어지는 것만 같아 애달파하던 날들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금을 긋고 출발하기보다는 주어진 조건 하에서 힘껏 살기를 바라게 되는 것.’(38)처럼 정말 열심히 엄마와 아내, 주부로서의 삶을 살던 시기였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40대의 끝자락에 머물고 있던 지라 가장 공감하며 읽은 부분은 마흔 살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흔 살이란 앞만 보고 달려온 걸음 앞의 커다란 걸림돌이다. 설혹 잘못 들어선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다는 것, 인생의 성패는 이미 판가름 난 것이 아닌가라는 성급한 판단에 초조해지기도 하고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이제야 확연히 보이는가 하면 여념 없이 살아온 날들에의 반성과 검토, 게다가 한 인간으로서의 내가 무엇이며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물음 앞에 피할 도리 없이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오정희, <내 마음의 무늬>, 황금 부엉이, 39쪽


 요즘 3,40대의 젊은 엄마들은 결혼과 육아, 일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분투한다. 나의 30대는 모호한 감정의 기류에 수시로 휩쓸린 적이 많았다. 내 주위의 친구들과 이웃들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아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 생각하다가도 미칠 것 같은 순간들이 찾아왔다.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일을 계속했다면....’이런 회의에 빠져들고, 결국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때가 많았다. 40대에 접어들어서야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과 아쉬움이 사그라들었다. 신기하게도 그 마음은 체념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마흔이 되었다고 갑자기 나이 든 티를 내며 우울하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씩씩하게 말하곤 했다. “마흔이라니, 불혹의 나이, 멋지지 않아?” 물론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해서였지만 말의 힘은 놀라웠다. 나의 40대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책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주체적인 나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행위적 신분적 존재로서 자리 매겨지는 것이 아닌 진정한 나를 느끼고 만나고 바라보는 일들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가를 알면서도 인습과 길들임의 편안함, 타성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모험이며 두려움으로 느낄 만큼 ‘작아지는 소망, 커지는 타성’에 절망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인생은 40부터라고 씩씩하게 주장하며.
 -  같은 책 40쪽


 십 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훌쩍 지나가버리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다 커서 내 품을 떠나 자신의 세계 속으로 힘차게 걸어 들어갔다. 남편의 실직과 재취업, 어설프게 시작했다 실패한 일, 입시, 교회 봉사, 가족들의 대소사...... 그렇게 40대가 지나가 버렸다. 뭉텅 흘러가 버린 시간을 의식하며 나를 제대로 돌아보기 시작한 게 40대 중반이다. 식구들을 일터와 학교로 보내고 도무지 무얼 해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책을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책 속으로 도망갔고, 질문의 늪에 빠졌다.

‘나는 누구지? 왜 이러고 살고 있지? 그동안 뭐를 한 거지? 앞으로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때 이후로 나의 시간은 책과 더불어 긴밀하게 얽히며 흘러갔다. 읽고 또 읽고, 기록하고, 글을 썼다. 사람들에게 책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함께 모여 읽었다. 독서모임을 열심히 열었고, 책을 썼다. 여전히 읽고 쓰는 사람으로 나이 들어가는 중이다. 2020년, 드디어 쉰 살이 되었다.

 쉰 살의 나이에 대해 쓴 글을 다시 읽는 내 가슴은 요동쳤다. 막 50대로 진입한 선배 언니의 말을 인용한 구절에서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흡족함과 안도감에 휩싸이게 했던 말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이었다. ‘생이 주는 환상과 환멸을 넘어선 나이’라 지칭한 50대의 나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 본연의 아름다움이 보이는’(41) 나이라고 불러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그러면서 덧붙인 내용은 마흔의 끝자락에 탐독했던 파커 J. 파머가 이야기한 “역설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를 또 다른 목소리로 듣는 것 같았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원하는 것과 원치 않은 것이 뒤섞여 있다는 것, 어떤 경우에도 플러스· 마이너스 요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같은 책 42쪽


그리고 이어진 60대의 이야기에는 더 감사했다. 아직은 상상이 되지 않지만 예순 살을 맞은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쳐 읽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라 확신한다. 담담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지나온 십 년을 돌아보며 ‘인생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성숙’(42)이라는 말에도, ‘인간이 나이에 따라 성숙하는 존재라면 그 이해할 수 없음과 모순과 불합리성을 조용히 수락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60대가 아닐까.’(42)라는 선생의 의견에도 이미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간혹 접하지만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누구든 우아하고 품위 있게 나이 들고 싶어 한다. 가장 먼저 꼽는 조건으로 경제적인 여유, 건강한 몸, 무난한 인간관계를 꼽는다. 물론 중요한 전제 조건이지만 쉽게 주어지진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어느 연령대가 되었든 모든 면에서 나이에 대한 문제를 경험한다. 그것은 본질적인 인간 경험이며, 어느 문화에서나 자아와 타자가 조우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는 또한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지점이기도 하다. 끈기와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면 이 지점에서 자기 삶에 부담을 지우는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가 되었든, 어떤 관점이 되었든 우리 각자는 자신의 나이에 대한 질문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자기 삶을 관조하는 민족학자 ethnologue가 된다.”

 -마르크 오제, <나이 없는 시간>, 플레이타임, 17-18쪽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제까지 나이가 변모시킨 우리들의 얼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낸 시간의 얼굴’(43)이라는 오정희 선생님의 글에서 나는 중요한 질문과 마주했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을 갖고 있을까? 50대를 지나며 나는 어떤 얼굴로 나이 들어갈까?

 쉰이라는 나이는 5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오며 축적된 질문들 속에서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한 질문들을 추려내야 할 시기가 아닐까.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살도록 부추기거나 외부의 잣대를 들이밀며 열패감에 빠지게 하는 질문들은 과감히 폐기하면서 말이다. 50대를 지나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책에서 길어 올린 중요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애쓰는 나를 누군가 그려준다면 <고맙습니다 선생님>에 나오는 트리샤의 모습 같았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글자 속에 깃든 문장의 의미와 조우하던 순간, 감탄하고 경이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런 얼굴. 혹은 스스로 책이 되어가는 '스토너' 같은 모습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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