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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Mar 13. 2020

그림책이라는 예술

나는 책을 보며 꽃처럼 피어난다

 숲에 가면 예쁘고, 싱그럽고, 선명한 색에 눈길이 먼저 갔다. 봄의 연둣빛 여린 새싹이야 누구든 반할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존재다. 여름의 짙푸른 나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가을에도 단풍이 든 나뭇잎에 감탄하느라 칙칙한 빛깔에 말라비틀어진 낙엽에는 눈길이 오래 머물지 않았다.

 쉰이라는 나이를 의식하며 살기 시작한 마흔아홉 살의 가을, 내 눈에 들어온 나무들이 남달랐다. 인생의 사계절에서 가을이라 불리는, 흔히 말하는 중년의 나이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마음만은 봄처럼 살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도 달라지는 몸 상태를 새삼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한겨울에 접어들며 보물인 양 가슴에 품고 읽었던 시도 이해인 수녀님의 ‘봄의 연가’였다. 사랑하고 있다면 언제든 봄일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붙들고 내 인생의 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랐는지 모르겠다. 겨울이 지나고 봄기운이 만연한 2월의 마지막 날, 집 앞 작은 숲에 산책을 나갔을 때다.


바스락거리는 갈색 참나무 잎사귀들을 밟으며 걷다가 아직 모자를 벗지 않은 도토리 한 개를 발견했다. 청설모 서너 마리가 한꺼번에 나무 위를 내달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던 터라 용케 먹잇감이 되지 않은 도토리가 반가웠다. 싹을 틔울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전날 읽은 그림책의 표지 그림이 그대로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듯했다. 안도현 시인이 글을 쓰고 김혜리 작가가 그린 <관계>라는 그림책이다. 수줍은 표정의 작은 도토리를 소중히 감싸 안은 갈색 잎들이 그려진 표지. 해가 잘 드는 쪽의 땅을 판 뒤 도토리를 넣고 흙을 덮었다. 상태가 좋은 낙엽을 골라 꽃 모양으로 장식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싹이 나고, 가느다란 가지가 자라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틀 뒤 다시 산책을 나갔다. 나무들마다 가지 끝에 오동통해진 잎눈을 매달고 있었다. 매년 봐도 신기하고 기특한 녀석들을 들여다보다가 자리를 잡고 앉아 수북이 쌓인 갈색 나뭇잎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들추어보면 검고 푹신한 흙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 아래 도토리나 풀씨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 생명에 대한 감탄보다도 이제 곧 흔적도 없이 없어질 썩어가는 잎들에 마음이 더 쓰이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도토리를 심었던 자리에 가 보았다. 이틀 사이에 꽃 모양으로 펼쳐 놓았던 나뭇잎들은 초라하게 푹 꺼진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토리야 힘내!’, 인사를 건넸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모든 것이 다 예쁘고 애틋하다. 나이가 어려도 똑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나이가 주는 선물이 있다. 시선의 정교함, 더 진해진 애정 같은 것.

 주름이 질수록 그윽하고 깊어지는 눈길에서 드러나는 영역이 있다.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비로소 알게 되는 건 지나온 시간만큼 놓치고 잃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도, 돈도, 시간도 잃어본 경험 같은. 상실의 경험이 쌓여갈수록 더 애틋하고 소중해질 수밖에 없다. 내 앞에 존재하는 사람이 사무치게 고맙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들을 비로소 알게 된다. 한 주가, 한 달이, 계절이 뭉텅이로 사라져 버리는 듯한 시간의 속도에 당황하며 어떻게든 시간을 붙들고 싶은 심정도 마찬가지다.


 감탄하는 것이 많아지고 감동하는 영역이 늘어나는 게 나이 듦의 선물이라면 분명 예술을 향유하며 살 기회도 많아진다. 사소한 것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선은 예술적 안목을 갈고닦아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이 듦 속에서 저절로 얻게 되는 선물이기도 하다. 생의 경이로움에 숙연해지는 순간이 많아지는 것이며 그만큼 살아있음 자체로 감사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그림책을 펼쳐 읽다가 울컥하는 감정의 파동이 철학적 사유로 이어질 때 미술관에서 누리는 감동 못지않은 위안을 받곤 한다. 한 장의 그림이 주는 깊은 울림은 어릴 적 나와 조우하는 순간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먼 훗날 할머니가 되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의 그리움을 미리 맛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림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매 순간 아름다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2019년 3월, 식구들이 모두 나간 아침, 이유 모를 울적함을 안고 그림책이 꽂혀 있는 책장 앞에 앉았다. 좋아하는 그림책이 눈에 띄었다. 시드니 스미스가 그린 <거리에 핀 꽃>이었다. 글자 없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읽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로 다가와서다. 작은 풀꽃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가 나오는 그림책을 천천히 보았다. 가엾고, 외롭고, 빛을 잃은 곳에 가만히 꽃을 놓아주는 이 아이를 오래전부터 사랑했다는 느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다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한 여자에게 눈길이 머물렀다.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아이는 통화 중인 아빠를 기다리며 담장 옆에 핀 풀꽃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장면이었다. 회색빛 도시는 흑백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네 군데만 색이 칠해져 있었다. 아이의 빨간 점퍼, 노란 풀꽃 두 송이, 멀리 보이는 빨간 버스, 그리고 여자의 원피스. 내 나이 또래의 여자는 버스를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다. 아홉 명의 사람들은 각각 다른 표정과 자세로 무료하거나 피곤하거나 초조한 듯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흑백의 그림 속에 유독 그 여자의 원피스만 화사하게 색을 입고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였다. 노랑, 분홍, 초록, 하늘 빛깔의 꽃들이 만발한 치마. 그때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여자의 표정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녀가 꽃처럼 피어 있었다. 그 순간 그림책을 읽는 나도 꽃처럼 피어났다. 꼬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작은 풀꽃들을 모으던 아이가 이번에는 나에게 꽃을 쑥 내밀며 “아줌마, 여기요!” 하는 것처럼.

 시멘트 벽 틈새, 보도블록 가장자리, 건물 사이의 귀퉁이에서도 꽃이 피어나듯, 질퍽거리는 마음에서도 아름다움은 솟아오를 수 있다. 나는 언제든 책을 읽으며 꽃처럼 피어난다.  

 그 강렬한 감동에 힘입어 2019년 3월 ‘반짝이는 달력 모임’의 주제를 이렇게 정했다.

'시드는 마음을 꽃피우는 달'

그림책, 소설, 시가 어우러지는 북 '큐레이션을 선보이며 함께 모인 사람들과 마음의 꽃을 화사하게 피워 올렸다.

 나이가 들며 주눅 들거나 서글퍼질 일은 수시로 찾아올지 모른다. 유명한 화가의 전시를 보러 다니거나, 음악회에 쫓아다니기에는 생활비가 빠듯할 수도 있겠다. 돋보기를 쓰고 오래 책을 읽기엔 버거워지는 날도 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림책이 나에게 미술관이 되어주고, 좋은 질문과 사유 거리를 던져주는 강의장이 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세심해지고 애틋해지는 시선으로 매 순간 아름다움을 붙들어 그 힘에 의지하며 살아가려 한다. 그림책이 곁에 있는 한 괜찮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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