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화정 Mar 13. 2020

50개의 봄만큼 사랑한다면

작고 사소한 것에도 우주만큼 경이로워

50대는 다시 사랑하기 좋을 시기다. 세상에 태어나 5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살아온 자신을 비로소 아끼고 존중해 줄 수 있는 기회다. 가장 많이 사랑해줘야 하는 대상은 남편도, 아이도 아닌 '나'라는 걸 깨닫고 제대로 실행해야 할 나이다. 어린 시절 꿈을 이루지 못했어도, 남들 앞에 내세울 번듯한 성과물이 없다 해도 살아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긍해줘야 할 때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다가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를 위해 산 게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후회하고 자책하느라 또 시간을 허비했다.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 서로를 고양시키며 함께 성장하는 사람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성의 있게 관계를 가꾸는 사람과 어울리고 싶었다. 타인을 제대로 아끼고 좋아하는 법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알게 되자 자연스레 타인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좋은 사람 곁에 있으려면 내가 먼저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나이가 가르쳐 준 것이다.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매진해야 할 때와 힘을 빼야 할 때를 가늠하는 것도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감을 잡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나이가 들수록 내려놓아야 할 게 많다는 걸 인정하면 내 삶의 반경이 좁아질지언정 단단한 밀도로 채울 수 있다. 내 삶의 울타리 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북적이느라 진짜 내 사람들을 놓칠 뻔했다는 걸 이제라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50대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여유가 생기고 다시 관계를 정비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다.


 벨마 윌리스가 쓴 <두 늙은 여자>에 나오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나이를 이야기한다. 그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마흔아홉 개의 봄을 보았다.' 쉰 번째의 봄을 보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앞으로 몇 개의 봄을 더 만나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10대의 봄도 좋았지만 40대의 봄은 그 네 배쯤 좋았다. 50대의 봄은 한 해 한 해 얼마나 더 벅찬 감격으로 만나게 될까?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많아진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렇다. 30대의 내 눈물은 이유 모를 억울함,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의 슬픔에서 솟아난 적이 많았다. 40대는 커가는 자식들을 어쩌지 못해 속으로 삼키는 눈물이 아니었을까. 죽음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때문에 울고, 점점 험해지는 세상에 대한 불안과 막막함에 겁이 나서 울음을 터뜨리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거나 허무해서 눈물을 줄줄 흘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50대는 영문도 모르고 흘리는 눈물을 만나는 시기가 아닐까. 문득 버스 창 밖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5인 병실 옆 침상에서 들려오는 사연이 가슴 아파 펑펑 우는 나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드라마를 보다 오열하고, 미술관 전시실 코너를 돌다 마주친 그림을 보며 숨죽여 울던 나. 돌이켜보면 그 모든 눈물이 사랑에서 배어 나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책을 보다가 고아가 된 소년과 다리 하나를 잃은 '세발이'라는 강아지의 우정에 목이 메고, 작고 여린 새싹이 고개를 내민 화분 앞에서 마냥 기뻐하던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 더 애틋해지고, 타인의 이야기가 나와는 무관한 일이 아니라 여기며 끌어안는 50대의 눈물은 얼마나 더 많아질까.

 50개의 봄이 차곡차곡 쌓여 그만큼의 설렘과 희열이 매해 증폭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3월 초, 포근해진 날씨로 봄을 감지하기도 하지만 나는 냄새로 봄이 코앞에 왔음을 알아챈다. 쓰레기를 버리러 3층 계단을 지나 2층에 이르렀을 때 코끝에 감기던 봄 냄새.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공기 내음에 코를 킁킁거리며 현관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문 밖을 나서자 훅 끼쳐오던 서늘한 밤공기. 분명히 냄새가 났다. 달큼하고 풋풋한 봄 냄새.

 여린 가지에 쪼르르 매달려 흡사 초록 장미처럼 보이는 어린잎을 들여다보는 건 또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산책길에 자꾸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을 하게 된다. 예쁘다고, 기특하다고 말을 거는 내 모습이라니.

공감, 연민의 마음이 증폭되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더 잘 사랑하게 되는 나이, 작고 사소한 것에도 우주만큼의 경이로움으로 감탄하고 감사하는 시기. 나의 50대는 다시 사랑하고, 더 잘 사랑할 시기로 정의 내리고 싶다.



이전 11화 그림책이라는 예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