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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Mar 13. 2020

고요한 환희, 쉰 번째 봄

시로 가꾸는 일상

 집안 곳곳에 시집이 놓여 있다. 콘솔 위나 침대 옆 작은 탁자, 가방 속에도 있다. 심지어 김치 국물이라도 튈까 염려하면서도 식탁에서 읽다 만 책을 그대로 엎어두기도 한다. 시집만 꽂아두는 작은 책장은 햇살 잘 드는 창가에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시를 좋아한다는 말보다 시와 더불어 산다는 말을 더 즐겨 쓴다.

 2020년 [반짝이는 달력 모임] 온라인 회원들은 매달 한 권의 시화집을 읽으며 소통한다. 여건이 안 되어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이들을 위해 시작한 모임이다. 3월 모임에서 봄에 어울리는 시를 소개하려고 고르다가 2018년  2월 18일 블로그에 쓴 글을 발견했다.



마흔 번째 봄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꽃 지는 봄 산처럼
나도 누군가의 가슴
한번 울렁여보았으면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듭니다> 시인생각 p14


동네 꽃집에서 어제 데려온 얘네들 때문에 하루 종일 울렁울렁, 두근두근.
큰일이다. 매해 증상이 더 심해진다.
어쩜 이리 예쁜 게냐!



 시를 공유하기 전 안내한 과제가 있었다. 첫 번째 과제는 한 달 동안 함께 읽는 시화집에서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골라 낭독한 파일을 공유하기다. 하루 동안 일곱 명의 목소리가 단톡 방에서 울려 나왔다. 조심스레 떨리는 목소리부터 희망에 겨워 톡톡 터지는 꽃망울 같은 노랫소리까지. 한 분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란 시를 읽고 어릴 적 즐겨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아이에게 노래를 가르쳐 준 뒤 모녀가 신나게 함께 부르는데 헤드폰을 쓰고 듣던 나는 헤벌쭉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다른 이의 시 낭송 파일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는 소리가 더없이 아름다운  배경음처럼 들려 잠시 시를 놓치기도 했다.  내가 식구들을 피해 화장실에서 녹음할 때 들리던 웅웅 울리는 소리가 나는 파일도 있어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시는 고상하고 우아한 체하지 않고 일상 깊숙이 파고들어 우리와 함께 웃고, 눈물을 글썽거리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시끌벅적  한바탕 수다를 떨듯 정겹고 따스한  봄날의 하루를 즐겼다. 내친김에 봄을 주제로 글을 써보자고 했다.

 여러분 모두 애쓰셨어요!  두 번째 과제 알려드릴게요. 봄에 관련된 시를 한편 써서...... 제출해주세요..... 하면 저부터도..... 안 돼!!!!  할 것이므로^^; 시는 쓰고 싶은 분에 한해서 쓰시고요~ 봄을 주제로 짧은 글을 한 편 써서 공유해주세요~ 여러분은 오늘 목소리로 글을 쓰신 거랍니다. 종이에 옮기신 후 잘 다듬으면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어요. 한 주간 또 뜻깊은 시간을 보내기로 해요 :)

 

하지만 반응은 소리 없는 아우성. 다시 공지를 올렸다.

시든 글이든 한 편 써보시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과제라는 말이 적절치 않아요. "우리 이런 거 해볼까요?"라는 제안으로 받아들여주세요. 누군가에게 책을 빌려주는 건 영혼을 열어젖히는 것과 같다는 글도 있지요. 하물며 남에게 글을 보여주는 건 아주 조심스럽고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쓰다 보면 내밀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지요. 그런 경우 글을 공개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만 글을 쓰면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그 글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들려주세요. 그리고 주제를 좀 좁힐게요.
'봄처럼 사랑하는 달'이라는 이번 달 주제에 맞춰 써주세요. 겨울 같은 마음에 봄처럼 찾아든 사람이나 사물, 에피소드에 대해서요. 혹은 내 안에 늘 봄 같은 존재에게 사랑 고백을 하셔도 좋겠지요.
외부로부터 주어진 과제라 할지라도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좋은 것들을 끌어내는 동력으로 삼으셨으면 좋겠어요. 분명 다 마치고 나면 조금은 자유로워진, 훨씬 괜찮아진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은 봄비가 내립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기로 해요. 고맙습니다.

 공지를 올린 후 소리 내어 시를 다시 읽어보았다. 마침 전날 나이에 대해 썼던 글을 고치고 있던 터였다. 마흔 번째 봄의 울렁거림과는 다른 무언가가 밀려들었다. 나도 말하고 싶었다. 분명 올해 내게 찾아온 봄은 특별했으니까 말이다. 책만 덜렁 놓여 있는 간이 책상에서 탁상 달력 밑에 있던 영수증을 발견하고 쓰기 시작했다. 시인은 아닙니다만, 중얼거리면서.

갈색 시간을 묵묵히 견디는 겨울산처럼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일하는 봄산처럼
고요한 환희, 쉰 번째 봄.


시인을 따라서 쓴, 시라고 할 수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나의 쉰 번째 봄이 이렇게 탄생했다.

시는 시인의 영역에서만 피어나는 건 아니다. 시를 읽는 독자의 일상에서 더 화사하고 처연하게 솟아오르기도 한다. 나는 밥상머리에서 시를 읽는다. 꽃을 보며 시를 기뻐한다. 보고 싶은 사람들의 육성으로 시를 듣는다. 쉰 번째 맞는 봄은 소리 없이 기쁘게 지르는 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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