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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Mar 28. 2020

<호랑이 바람>이제 연대의 바람으로

북 코디네이터의 그림책 이야기

호수 공원의 나무들

2018년 12월,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오고 나서 어딜 봐도 눈에 들어오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없었다면 쉽게 정을 붙이기 어려웠을 게다.

단지로 들어서는 큰길 말고 골목길이 하나 있다. 일부러 그 길로 다니는 이유는 메타세쿼이어 나무가 열 그루 가량 일렬로 늘어서 있기 때문이었다. 2층 주택 높이 정도의 아담한 나무들이었다. 좁은 차도를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어 그 앞에 서서 나무를 쳐다보고 있으면 작은 숲속에 있는 느낌 못지않게 싱그러웠다. 바람이 불면 가느다란 잎사귀들이 초록 물결을 이루며 춤추듯 하늘거리는 모습을 좋아했었다.


3월 초, 집으로 들어가다가 유난히 경쾌하게 지저귀는 작은 새들이 (찾아보니 붉은 머리 오목눈이) 우르르 날아다니는 모습이 귀여워서 한참을 나무 앞에 서 있었다. 아직은 겨울나무지만 곧 여리여리한 연둣빛 잎사귀들을 만날 생각에 몹시 설레었다. 며칠 뒤 습관대로 편한 길을 놔두고 나무를 보러 골목길로 들어섰다. 봄나물이 있나 땅을 쳐다보고 걷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헉, 소리가 나왔다. 나무들이 사라졌다. 포클레인이 한 대 서 있었고, 잘린 나뭇가지들 묶음이 한쪽에 쌓여 있었다. 울면서 집에 들어갔다.

<호랑이 바람>을 읽다가 울음을 터뜨린 건 고성 산불로 사라진 나무들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거대하게 사람들을 집어삼켰는지 생생하게 다가와서다. 얼마 전 잃은 나무 친구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작년 여름 김지연 작가님의 <백아이>북토크에서 이 작품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첩에 스케치한 그림을 보는 행운도 누렸다. <백아이>가 나오기까지 임시정부 자취를 따라 답사하신 여정, 판화 작업의 지난한 과정들, 가슴 아픈 자료들을 읽으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이야기를 들은 자리였다. 이 책은 그때부터 기다린 책이다.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작가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제일 먼저 읽은 작가 소개 글에 고스란히 그 마음이 들어 있었다.

마블링으로 표현한 산불 장면은 뜨겁고 아프게 다가온다. '와, 소방관이다' 함성을 지르고, 모두가 두 손 꼭 잡고 힘을 합쳐 불길을 잡지만 '자꾸자꾸 눈물이 나요'라는 글귀에 자꾸 작가님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림책 속에는 나무를 꼭 끌어안는 마음이 들어 있다. 초록 풀을 소중히 보듬어 안은 아이가 전하는 희망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다시 피어나는 산, '높은성'에 초대받았다.

'연대'의 힘으로 우리 앞에 놓인 재난을 이겨내자는 작가의 말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산언저리에 작가님을 꼭 닮은 이가 허리에 두 손을 짚고 당당하게 서서 웃고 있기 때문이다. (내 추측일 뿐이다.)

'더 단단한 내일'이 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연대의 끈을 어떻게 더 튼튼히 엮어나갈 수 있을까?

우리를 덮치는 재난은 산불, 바이러스, 성범죄뿐만이 아니다. 온갖 부정적인 말들이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다.

혐오, 불신, 학대, 착취, 절망, 이기주의의 말들을 포용, 신뢰, 돌봄, 존중, 희망, 연대의 언어로 바꾸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새까맣게 탄 산등성이에 작은 풀 한 포기가 돋아나듯, 죽은 듯 보이는 나무에 초록 싹이 피어나듯 우리 사회에 사람을 살리는 말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언어가 돋아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다시 함께.

다시 초록.

다시 반짝이는 말들을 심는 것.

나는 어떤 말을 찾아 심을 것인지 찾아보려고 한다.


#호랑이바람#김지연#다림#북코디네이터의그림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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