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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Jul 05. 2020

언어가 사라진 뒤에 남는 것

<고마운 마음> 델핀 드 비강/윤석헌/레모

출처:네이버 영화

나는 치매라는 말이 무섭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영화나 드라마, 책에서 숱하게 봐 왔기 때문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에서 본 줄리언 무어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현명하고 자애로운 아내이자 엄마, 언어학 교수 앨리스는 50세라는 나이에 조발성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어느 날 갑자기 익숙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당혹스러워하던 앨리스는 서서히 자신이 구축해온 세계가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  병세가 짙어지며 앨리스의 눈빛도 초점을 잃고 텅 비어 간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고마운 마음>에 나오는 미쉬카는 오랫동안 신문사에서 교정교열 업무를 담당하던 사람이다. 누구보다 단어를 사랑하던 그녀는 요양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서서히 자신의 언어를 잃어간다. 비교적 분량이 짧은 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묵직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언어가 없다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까?”


마음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삶이라는 게 결국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돌보며 사는 일이  아닌가. 마음을 탐구하는 심정으로 책을 읽는 나로서는 델핀 드 비강이 ‘고마운 마음’에 대해 정의 내린 부분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마운 마음이란, 타인에게 빚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빚을 소중한 관계의 형태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세 인물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배려하며 지내는 과정에서 생겨난 ‘고마운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을 앞두고 실어증에 걸린 미쉬카 할머니는 어떻게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언어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쓴다. 젊은 언어치료사 제롬은 미쉬카 할머니의 품위를 지켜주면서 그녀의 말들이 사라지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들 목소리의 떨림을 정말 좋아한다. 그 허약함, 그 온화함, 그들의 뒤바뀐 말들, 막연한 말들, 방황하는 말들, 그리고 침묵을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전부 보관한다. 그들이 세상을 뜨고 나서도. ’ (50)


사라지는 말들과 침묵을 존중하는 마음을 미쉬카 할머니는 정말 고마워하지 않았을까. 그 고마운 마음이 어떻게 관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사랑을 잉태하는지 이 소설은 잔잔하게 보여준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남용되어 정작 아름다운 것들의 빛을 가리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다. 그럼에도 나는 띠지에 박힌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말에 고개를 깊이 끄덕인다. 이 책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어떤 마음들'이라고 쓰고 싶다. 그 아름다움은 ‘외투 없이 공원에 나온 어린 소녀’의 상처와 외로움을 알아보고 기꺼이 부모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쏟아붓는 ‘사랑하는 마음’이다.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도리스 레싱, 실비아 플러스, 버지니아 울프의 책들을 읽었고, <르몽드>를 구독했고, 비록 머리기사뿐일지라도 매일매일 그날 치 신문을 훑어보던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애달프고 저린 마음’이다. 언어를 잃어가는 한 노인의 삶의 품위를 어떻게든 지켜주기 위해 애쓰는 젊은 언어치료사의 ‘사려 깊은 마음’이다. 철자를 혼동하고, 생각과 다른 말이 튀어나오는 미쉬카의 언어에 더 깊은 의미를 담으려고 애쓴 ‘작가의 마음’과, 어떻게든 그 의미를 전달하고자 애쓴 ‘번역가의 마음’이다.

요양소의 일상은 단조롭고,  큰 사건 없이 흘러가 편안하게 책을 읽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급작스런 감정에 휘말려 눈물을 쏟고 말았는데,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결국은 생을 등지고 떠날 미쉬카 할머니의 마지막을 예상하고 있었고 이미 슬픔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그렇게 따스하고 뭉클하고 고마운 마음이 드는 이별 장면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처음 띠지에서 보았던 질문에 답을 할 차례다. 언어가 없어도 남는 건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남긴 마음의 흔적들이 아닐까. 마지막 마리와 제롬이 나눈 대화 속에서 다시 살아난 미쉬카 할머니의 마음처럼 말이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켜준 제롬에게 어린 소녀에서 이제 출산을 앞둔 마리가 하는 말, “정말 거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제롬.”

그리고 제롬의 대답, “저도 할머니께 거맙다는 말을 해야만 했어요.”

언어가 사라져도 남는 건 이런 마음이다. 말보다 강한 마음. 고마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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