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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Jun 10. 2020

시와 그림책의 위안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 바람이><지난여름>


평소보다 더 분주한 하루,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날.... 달력에 표시를 한 날을 위해 준비하고, 잘 끝내고 난 뒤 다음 날이면 세상은 변함없이 잘 돌아가는데 나만 일시 정지 상태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거기서 삐끗하면 한두 시간을 꼼짝 않고 무기력하게 자꾸만 가라앉는 나와 대치해야 한다. 처리해야 할 일, 봐야 할 책, 치워야 할 것, 연락할 일, 들를 곳, 장 볼 목록, 써야 할 글들, 공지해야 할 과제, 다음 모임의 주제,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잔소리, 토스 금융 사고 소식 등 생각이 밀려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뭐부터 하고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까, 어떻게 바꿀까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데 몸은 전혀 움직일 기미를 안 보일 때, 난감하다

외부 일정이 아닌 스스로 세운 계획을 잘 실행하고 산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지만 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 나만 알고 남들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한 약속과 계획, 아무런 보상도 없지만 가치를 두고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행위...

그만 하고 싶고, 혼자 하기엔 막막하고, 때로 지치는 순간에 조용한 싸움이 일어나는 이 자리에서 시집을 펼쳤다.
오늘 날짜에는 윤동주의 시가 실려 있었고, 내 마음을 들킨 듯싶어 놀랐다가 이내 울컥했다.

<산림>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시계가 자근자근 가슴을 때려
불안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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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픈 한 몸을 포옹할 인연'으로 다가오는 나무와 숲과 산을 노래하는 시인에게도 때로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공포로 떨게 했나 보다. 그럼에도 시는 이렇게 맺는다.

'나무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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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한 권을 가져다 표지를 쳐다보는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나무  잎사귀를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쓰다듬었던 자작나무 기둥의 질감을 떠올리기도 하고 숲의 냄새를 기억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깊은 밤, 깊은 숲의 밤하늘이 펼쳐지는 장면, 늘 똑같은 반응이 나온다. 처음 만난 그 순간처럼 하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희망스럽다고 말하기엔 아직 몸도 마음도 여전히 무겁고 칙칙하다. 방금 지나간 반짝이는 순간이 너무나 소중해 기록하고 싶었다. 훌쩍 한 시간이 흘렀고, 다시 책을 바라보며 생각 하나를 보탠다.
오늘 밤, 비가 온다고는 했지만 창 밖 풍경을 보며 이 시와 그림책을 꼭 다시 봐야지, 하고.
분명 그 순간 다시 반짝, 마음이 환해질 걸 믿으니까.

#지난여름#김지현 웅진주니어
#이파리를흔드는저녁바람이 #윤동주#산림#저녁달고양이
#북코디네이터의그림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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