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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현 May 22. 2016

책상 위 작은 수목원

뇌종양 수술 이후 책상의 변화, 그것은 나 스스로의 과속 방지턱이었다

과속방지턱(過速防止-) : 일반 도로구간에서 차량의 주행 속도를 강제로 낮추기 위하여 길바닥에 설치하는 턱으로 보통 주거 환경이나 보행자 보호를 위하여 설치하며, 포장과 다른 색으로 표시를 한다. - 위키피아

내 책상은 나 자신을 상대로 다양한 임상실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회사 복직 이후에도 어쩔 수 없이 업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면, 최대한 덜 받게 하고 강제로 스트레스 지수를 낮추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셈이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습관을 바꿔보려는 '마음'이 중요하고, 혹시 마음이 약해지면 흐지부지될까 봐 과속 방치턱과 같은 의도적인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뇌종양 수술 이전에는 클라이언트과 약속한 제안서 제출 시점이 임박하거나 '왜 파일 안 보내주냐'는 재촉 전화를 받은 후에는, 손은 바쁘게 자판을 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부족한 시간을 아쉬워하고 극도의 긴장상태인 감마파가 마구 활성화되었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서너 시간을 노트북 앞에서 꾸부정 자세로 앉아서 일할 때가 많았다. 제안서 내용 전체를 눈으로 빠르게 훏고 오타 여부를 체크, 파일 저장을 하면 메일 본문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제안서 작성이 끝나면 다시 메일 본문, 제안서 확인, 파일 첨부하고 '메일 발송하기' 버튼을 누른 후에야 비로소 목이 뻐근해지고, 허리가 아파오고 화장실이 급한 상황임을 깨닫는다.

시각적 편안함과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녹색효과'

짙은 회색 파티션, 검은색 노트북, 철판으로 된 선반, 전화기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채색이라 답답한 느낌을 준다. 약간의 포인트가 필요해서 지하 꽃집에 가서 식물들을 몇 개 샀다. 아이비, 하트 아이비, 푸미라, 줄리아 페페. 이름도 어렵고 물 주기도 어려워서 주인아주머니께 애들 각각 명찰을 달아달라고 부탁했다. 명찰 밑에는 ‘7~10일 1회’ ‘주 2~3회’ 같은 물 주기 기간과 횟수가 적혀있다. 

사람은 시각적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색깔에 의해 신체, 정신적 자극을 많이 받게 된다. 특히 녹색은 마음을 평온하고 안정되게 만들며 신체적 건강을 향상하는 작용까지 하기 때문에 건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무와 숲이 우거진 곳에서 운동을 하면 '녹색효과'로 인해 운동효과가 향상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 때문인지 식물에 물을 뿌리고 있는 나도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매일 아침 소형 분무기에서 책상 위 식물 아이들에게 물 뿌릴 때 나오는 '스윽 스윽' 소리도 내 귀를 편하게 하고, 이때 뿜어 나온 물이 각각의 잎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걸 보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사무실이 건조해서 금세 마르지만 물먹은 아이들은 1-2시간 후 줄기가 빳빳하게 서 있는 듯하다. 역시 인간 아이들이건 식물 아이들이건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회사 이름이 쓰인 종이컵을 작은 화분 삼아 제이드 포인트, 화제, 염좌라는 이름의 선인장을 올려놨다. 제이드 포인트는 위에서 보면 꽃이 활짝 핀 모양이고 옆에서 보면 바나나 묶음처럼 생겼다. 염좌는 장미꽃처럼 생겼다. 사람마다 각각 얼굴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듯이 선인장도 이름도 어렵고 생김새로 각각 다르다. 


팀장님이 서서 일하는 내 뒷모습을 보면 디제잉하는 박명수 같다고 한다.

난 서서 일한다. 서서 일하는 책상 위에는 노트북 거치대가 올려져 있다. 키보드 서랍은 높이가 맞지 않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쓴다. 대신 키보드 서랍은 전화기, 지갑, 스마트폰의 수납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서서 일하면 좋은 점!
건강 : 머리에서 발끝까지 원활한 혈액순환에 좋습니다.
능률 : 집중력이 높아져서 업무 능력이 향상됩니다.
소통 : 시야가 넓어져서 소통이 원활하여집니다.
체력 : 서있는 훈련으로 하체가 튼튼해집니다.
이동성 : 유사시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공간성 : 서있는 반경이 작아져 공간을 넓게 쓸 수 있습니다. 

라고, 인터파크 쇼핑에 적혀있어서 '서서 일하는 책상' 질렀었는데, 다음은 나를 대상으로 임상 실험한 결과다. 원래 계획은 30분 서서 일하고 5분 의자에 앉아서 쉴 아름다운 계획이었으나, 직장인들에게는 계획이 무의미한가 보다. 메일 보내고 통화하고 하다 보니 서있는 시간이 꽤 길었다. 중간중간 다리, 발목 스트레칭을 하게 되는 건 좋은 것 같고 의자에 앉아있을 때보다는 허리에 무리가 덜 가고 거북이 자세로 일하는 거 자체가 사라졌으니 일단 그걸로 만족이다.

 서 있는 것 자체가 은근 칼로비 소비가 많이 된다.
결론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오후쯤 되니까 다리가 굶어지는 느낌이 들고 장단지 아래 부위에 제법 근육이 생겨 단단하다. 원래 나는 상체보다는 하체가 튼튼했었는데, 더 튼튼해지면.... 물구나무를 서야 되나? 작년 조직 개편으로 인한 자리이동으로 내 자리는 맨 구석 창가 쪽이다. 그래서 본부장님은 대각선 방향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인데, 혼자 서 있으니 자리에 있냐/없냐가 금방 표시 난다. 그래서 이동성은 0점이다. 소통은 시야가 넓어져서 창문이 넓게 보이는 장점은 있으나 죄다 블라인드를 쳐놔서 블라인드만 넓게 보이는 단점이 있다. 공간성은 책상 높이에 맞춰서 모든 사무기기들의 높이 에너지가 높아졌다. 전화기, 화장지, 달력 등 전부다 높은 위치로 옮겨놨다. 


책상 왼쪽 파티션에는 클라이언트, 협력업체의 연락처가 적혀있다. 매번 연락처를 찾기가 힘들어서 아예 명함들을 10장 배치하고 A4 종이에 복사를 했다. 프로젝트 각각의 연락처들이 붙어있고 아날로그적 방법이지만 나름 괜찮은 방법이다. 책상 정면에는 내 자리임을 알리는 이름표가 붙어있고, 그 아래 <2016 To Do List> 출력물과 달력이 붙어있다. <2016To Do List>는 지금 내 주변에 둘러싸여 있는 많은 일들을 무리하지 말고 2열 종대로 배치해서 차근차근 하자만 나와의 약속이다. 눈에 잘 보이는 위치에 붙여놓고 매일매일 자기다짐을 하고 있다. 일종의 메타인지 장치인 셈이다. 본 책상 위에는 수소 생성기, 현미차 내려 마실 수 있는 것, 탁상시계, 곽휴지, 지압계, 핸드크림, 립밤, 코 분무기, 비타민 아침저녁 약, 책들, 노트와 출력물, 연필꽂이, 숯 등이 있다. 연필꽂이는 둘째가 도자기 수업 때 만든 건데 몰래 가져왔다.


책상 오른편에는 작년에 사비로 구입한 철판 선반이 있다. 선반 위에는 칫솔, 치약, 미스트, 유산균, 비염약, 효모 비타민제, 현미가 있다. 작년 회사에서 진행한 쿠킹 클래스 때 아내와 찍은 사진이 액자에 담겨 있다. 남들이 보면 결혼 12년 차 아이 셋의 부부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진 속 환한 미소와 다정한 포즈가 맘에 든다. 심하게 얘기하면 막 연애를 시작한 커플 같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나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내 복지 프로그램들은 꼭 참여 신청을 한다. 인원 제한이 있어서 신청을 한다고 전부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난 5년 간 가족과 함께 참석한 프로그램이 회사 콘도 이용은 물론이고 '가족 초대 연말 송년회' '텃밭 가꾸기' '식목일 나무 심기' '자녀 영어캠프' '쿠킹 클래스'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렇게 작성하고 보니 우리 회사 좋은 회사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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