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동안 나와 살아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
부부 방 침대 머리맡에는 12년 전 청담동 모 스튜디오에서 찍은 웨딩 촬영 액자가 걸려 있다.
액자 속 사진에는 과도한 뽀샵 처리 때문에 신랑 신부의 코가 희미하게 보이지만, 며칠 후에 있을 결혼식과 신혼여행에 마냥 들떠있는 새파랗게 어린 30살 동갑내기 예비부부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당시 결혼이란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있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보다는 무엇이든 잘 될 거라는 장밋빛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인가 액자 속 사진이 현재 우리 부부의 모습이 아니고, 인생에 대해서.. 특히 결혼생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 부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만큼 우리 부부는 30년을 남남으로 살다가 결혼하게 되면서 인생을 하나하나 깨우치면서 살고 있었다.
남들 다 겪는 문제, 우리 부부라고 안 겪었을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결혼 12년을 되돌아보면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비서와 CS강사로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열정적인 워킹우먼으로 20대를 보낸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임신과 육아를 반복하는 전업주부로 신세가 바뀌었다. 아내 입장에서는 9개월 간 짧은 연애를 마치고 남자만 믿고 결심한 결혼치고는 예상치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미리 결과를 알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선택을 했다면 우리는 천생연분이다!
신혼 초, '착한' 인상의 남편과 달리 '강한' 인상의 아내는 무척이나 억울해했다.
"신랑이 참 자상할 것 같다" "집안일 많이 도와줄 것 같다"라는 아내 친구들의 기대와 달리, 난 잘해줄 것 같다는 이미지만 풍길뿐 실제로는 몸을 잘 안 움직이는 게으른 남편이었다. 친구들은 그것도 모르고 부러워만 하니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아내 속으로 참 답답했겠다 싶다. 반대로 내 경우에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 "제수씨가 너무 쎄 보이 더라" "신혼 초에는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 잘해라"라는 친구나 선배들의 걱정 어린 우려와 달리, 아내는 키 크고 이쁘고, 요리 잘하고 살림 잘하고, 같이 걷고 있으면 '잘 어울린다' 소리 꽤 들었고, 음주가무 성향도 비슷하고, 썰렁한 말장난 개그에도 잘 웃어주고, 나를 믿어주고 이해해주는 동갑내기 친구이자 최고의 신붓감이었다.
회사로 바쁜 남편 대신 홀로 육아와 집안 살림을 전담하는 아내, 그로 인한 산후 우울증, 평일 주말 가릴 것도 없이 일했지만 4-5개월씩 급여가 밀린 적도 있어서 신혼 초 자금 계획이 난처해진 아내,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없는 살림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신혼 초 아내에게 한 달 용돈 12만 원을 받았는데 3년 차에는 15만 원으로 대폭 인상! 3만 원 올랐을 때의 기쁨이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만큼 좋았다. 반면 사소한 문제로 부부 싸움하기도 하고, 아이 문제로 상처 입기도 하고, 술 취해 새벽에 들어온 날이면 집안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며칠 동안 아내 눈치 보느라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가 답답한 마음에 내가 화를 내보기도 했다가 정황상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서 결국 아내의 용서로 가까스로 화해를 한 적도 부지기수다. 그 외에도 고부간 갈등이나 처가 식구들로 인한 갈등, 서운함, 오해 등등 남들 다 겪는 문제, 우리 부부라고 안 겪었을까?
음식 솜씨가 좋은 아내를 회사 동료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당시에는 아내가 둘째 아이 임신 중이어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어봤다.
"나 자기한테 할 말이 있는데..."
"뭔데? 해봐"
"새롭게 회사 옮기고 해서 팀장님하고 팀원들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걱정과 달리 아내는 쿨하게 대답한다.
"몇 명인데? 날짜랑 도착 시간 정해서 알려줘"
D자형 임산부 몸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남편 기 살려주려고 회사 동료들 초대해서 일반 가정집에서는 볼 수 없는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있을법한 음식들을 차려주었다. 라이스 카나페, 또띠아 샐러드, 매운 낙지볶음, 부추 해물 양념 비빔밥, 치즈 불닭에 마지막은 디저트와 과일로 모든 사람들이 배 터지게 먹었다.
아내의 쿨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2011년 가을에는 셋째 아이 임신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음에도 신랑을 9박 10일 자전거 전국일주를 보내주었고, 2014년 10월 25일. 뇌종양 수술 후 공기 좋은 관악산 근처 아파트로 이사하는 날, 이삿짐 옮기면 힘들고 먼지가 많이 나서 안 좋다며 야구 좋아하는 나를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LG vs NC 4차전 경기가 열리는 잠실로 보내주었다. 2015년 7월에는 세 아이들은 자기에게 맡기라며 시어머니와 아들 단 둘이 해외여행을 보내주었다. 처음에는 철없이 좋다고 했었지만 나중에는 외벌이 하는 집안 가장에게 자유라는 특별함 주는 아내의 배려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아내가 참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항상 아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자기 힘들면 회사 그만 다녀도 돼"
"어? 내가 회사 그만두면 돈은 누가 벌고?"
"내가 벌면 되잖아. 자기 힘들면 6개월이든 1년이든 쉬어. 충분히 쉬고 다시 일하면 되잖아"
"어. 그렇게 할게"
다른 사람에게 이 얘기를 하면 열이면 열 '참 아내분 대단하시다' '참 제수씨 대단하다'라고 한다. 실제로 하던 안 하던 요즘 같은 시대에 아내와 같은 경단녀가 이런 마음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아내는 종종 이런 말도 했다.
"자기가 먼저 죽던 내가 먼저 죽던 그 시간이 1년 이내였으면 좋겠어"
"왜?"
"누군가가 홀로 남게 된다면 그 사람이 불쌍하잖아"
"어. 그렇게 할게"
10여 년을 홀로 사셨던 장모님이나 18년을 홀로 살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면 저절로 공감되는 말이다. 대한민국 남자 평균 수명이 여자 평균 수명보다 짧고 특히나 기대수명보다 건강수명이 짧은 시대에 남자의 건강이 특히나 중요하다. 40대 건강해야 50대 건강할 수 있고, 60대에 건강해야 70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연예 시절, 데이트할 때마다 그 당시 여자친구, 지금의 아내를 세뇌시켰다.
"나는 이상형과 결혼하지는 않을 거야. 이상형과 결혼했다는 말 안 믿어.
이상형의 80%인 사람과 결혼해서 나이 60살 됐을 때야 비로소 이상형 100%를 채우고 싶어."
"그럼 난 자기 이상형의 몇 % 야?"
"음.. 79%"
"뭐야... 나쁘지 않은데? 호호"
결혼 12년 차에 접어든 오늘에야 고백한다. 당신은 내 이상형의 100%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