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0장
[Sky Bones(하늘의 뼈)]
제270장 — 기억의 전쟁, 잊힌 차원, 그리고 마지막 설계자의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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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란, 우리는 준비됐어.”
카이엘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그의 등 뒤로 백여 척의 ‘기억 방주’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 배들은 함선이라기보다 유기체에 가까웠다.
각기 다른 생명의 기억으로 길들여진 이 함선들은,
지금 이 순간, ‘존재’ 자체를 무기로 전환하고 있었다.
한편, 세란은 방주의 중심에 앉아
자신의 기억을 감각으로 풀고 있었다.
과거, 푸른 별에서 날아오르던 인간들.
그들이 스스로 날개를 버린 순간.
그리고 지금, 그날의 후손이
‘기억의 창조자’가 되어
자신을 지우려는 자들과 맞서려 한다.
“라쉬타르…
너희는 과거에 갇힌 자들이야.”
세란의 목소리는
함선 전체에 울려 퍼졌다.
“우린, 과거를 기억하되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라쉬타르의 전술은 무시무시했다.
그들은 전투를 시작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의 ‘기억’을 공격한다.
한 명의 병사가 공격받으면
그는 자기 삶의 흐름이 거꾸로 감기기 시작하며
결국 태어나기도 전으로 사라진다.
기억이 지워진 자는 존재도 없다.
“세란, 방어벽을 뚫고 들어왔다!”
루첼의 경고가 날카롭게 터졌다.
라쉬타르의 주력 사령관,
에르쿠스,
그는 과거의 시간 수호자이자
첫 번째 창조 당시, 설계자 옆에서 설계를 도운 자였다.
“세란, 감히 창조의 이름을 더럽히는가.”
에르쿠스의 목소리는 뇌처럼 울렸다.
그는 ‘기억이 없는 세계’만이 순수하다고 믿는 자.
기억은 곧 고통이기에,
그는 과거의 전부를 봉인하려 했다.
세란은 고요히 일어섰다.
그녀의 이마엔 여전히
심장의 씨앗 문양이 반짝였다.
“기억은 고통일 수 있어.
하지만 동시에
우릴 인간으로 만드는 유일한 힘이야.”
그녀가 손을 펼치자
주위의 시간들이 떨기 시작했다.
세란은 방주의 중심을 넘어,
라쉬타르 선단의 중앙 코어로 ‘전이’했다.
그녀의 발아래,
기억으로 된 바다가 넘실거렸다.
누군가의 어린 시절.
누군가의 마지막 포옹.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던 절규…
“이 모든 걸 지우고 싶어?”
세란은 에르쿠스에게 물었다.
“네가 설계했던 그 최초의 우주는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완벽했나?”
에르쿠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렇다.
기억은 변질된다.
그 변질은 감정이 되고,
감정은 전쟁을 낳는다.”
“아니,”
세란은 속삭였다.
“기억은 사랑이 된다.”
그 순간,
에르쿠스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 그녀였다.
작은 존재.
빛의 잔해 속에서 떠오른 얼굴.
세란의 기억 속 깊은 곳,
어릴 적 이름조차 잊은 여동생.
“루아?”
루아는 눈물 없이 웃었다.
그녀는 에르쿠스의 손에 의해
이차원의 봉인으로 갇혀 있었던
‘세 번째 설계자’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언니… 기억해 줘.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란의 몸에서
심장의 빛이 폭발처럼 터졌다.
그 빛은 무기를 파괴하지 않았지만,
모든 병사의 뇌에,
잊고 있던 첫 기억을 되살렸다.
엄마의 눈.
첫 친구.
지구의 푸른 하늘.
라쉬타르 병사들은
검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고통을 느꼈고,
고통을 이해했다.
그 순간,
전쟁은 끝났다.
에르쿠스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서도
오랜 시간 봉인된 기억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 또한…
‘기억을 지운 자’였던 것.
세란은 마지막 방주에 서서
우주의 재정렬을 지켜보았다.
“이제부터,
기억은 무기이자,
치유다.”
그녀는 속삭였다.
그리고
하늘의 뼈는,
새로운 생명의 설계도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