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3. 디카시 & 에세이

by 조규옥


너와 내가 만나면

시도 때도 없이 두근두근



바람이 뒤채고 있었다. 무심한 듯 부는 바람에도 아직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단풍잎이 일렁이며 흔들린다. 들썩이며 속울음을 울고 있는 것도 같다. 2월도 벌써 중순이니 벌써 떠나야 했음을 그들도 안다. 그들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건 뭘까? 지난 계절의 그리움이 강해서? 아니면 닥쳐 올 이별의 아픔이 너무 커서 버티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 공원에 와 있다. 산책을 하다가 산비탈에 있는 테크 쉼터 안에 있는 노천카페에 앉아 있다.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임에도 사람이 별로 없다. 평일 날이면 산책하다 이 노천카페에 앉아 여유를 즐긴다. 한적함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바람이 스쳐가는 느낌도 좋고, 이제 아장아장 걷는 아가와 젊은 엄마의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를 듣는 것이 좋다. 사실 그 웃음소리가 내게는 닿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몸짓에서 충분히 그걸 느낄 수가 있어 웃음소리마저 들리는 환각이 생겨 좋다.


자리 값은 해야겠기에 커피 한잔을 시켰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공원을 내려다보았다. 가까이 호숫가에 살고 있는 버드나무 숲에는 아련히 연두 빛이 보일 듯 말 듯 번져가고 있었다.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벚나무 가지마다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르면 일제히 꽃불을 피워 올릴 봄 꿈을 꾸고 있을 터였다. 가끔씩 부는 찬바람은 나를 기분 좋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보니 아까 산책길을 걸어올 때 개나리 꽃망울 속에서도 언 듯 언 듯 병아리를 닮은 노란빛을 본 기억이 떠 올랐다.


“71번 손님, 커피 나왔습니다.”

커피 나왔다는 방송 소리에 후다닥 일어나 커피를 받아 자리로 돌아 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보며 혼란스러움에 빠졌다.

‘마실까?’

‘말까?’

‘아니야, 마시면 또 혼란스러워 질 게야.’


마시지 않기로 했다. 오후가 시작된 시간 이후에 마시면 두근대는 가슴이 잠을 쫒아 버릴 것이고, 나는 지나 온 길을 돌고 돌아 그에게 가 닿을 것이다. 이 나이에 참이 보약이라 그것은 아니지 싶다. 대신 커피 냄새만 맡기로 했다. 커피 잔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따끈함이 좋다. 잠시 두 손으로 커피 잔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숙여 커피 냄새를 길게 오래 들여 마셨다가 후~~하고 내 쉬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아늑하고 마음이 편해져 왔다. 오래 된, 그래서 나와 일체가 된 쇼파에 깊숙이 앉은 느낌이랄까?


커피 잔을 내려놓고 난간에 기대어 눈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잔디밭인 청운답원에 좀 전에는 보이지 않던 할아버지와 손자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연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연줄을 짧게 잡고 달리며 연을 날리려 애를 쓰는 모양인데 연이 생각대로 날아오르지 않는다. 아이도 할아버지도 잔디밭을 이리저리 달려도 연은 쉬이 날아오르니 않는다. 연이 날아오르기엔 바람이 따라주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내겐 한 없이 정겹고 행복한 모습이다.


“같이 커피 마셔도 되겠어요? 혼자 커피 마시는 게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

라고 하는 소리에 놀라 쳐다보니, 나이 지긋한, 한 없이 인자한 모습의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떤 대답을 해 얄 지 몰라 허둥대는 사이에 그 남자가 내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커피, 안 마시고 뭐 하세요?”

“아~~ 예”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심장이 바삐 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커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 말았다. 온몸의 세포들이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두근거림과 호기심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두근거렸다. 커피란, 그런 것이다. 사랑의 시작도 그런 것이다. 결말이 어떻게 끝나든 간에 두근거림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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