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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밖 May 19. 2020

2년 육아휴직을 쓴 남편을 보내며

아내와 엄마가 되어준 남편의 도약을 응원하며

남편은 2년 동안 육아휴직을 하며 설거지의 달인이 됐다.

두 아이를 출산하고 육아와 가사로 지쳐가던 어느 날, 빨래를 개며 야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토로했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해?"

남편육아휴직이란 말을 입에 담았고, 그렇게 2 동안의 육아휴직이 시작됐다. 인수인계 기간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평생 다시는 내지 못할 23일간의 유럽 여행을 감행했다. 유럽 여행으로 우리의 육아휴직은 화려하게 시작됐지만, 2년이란 시간이 이렇게 후딱 지나갈 줄은 몰랐다.



친구들은, 남편의 육아휴직을 두고 염려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동네에 사는 아이 엄마들은 더 난리였다. 나는 걱정할 때마다, "남편도 애 업고 서서 컵라면 먹어봐야지. 인간답게 먹는 밥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남편한테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대꾸했다. 그러나, 퇴근 후 쓰레기통에 쌓여있는 컵라면 용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올챙이 적을 잊은 개구리마냥 "왜 또 컵라면을 먹었냐"고 타박했다. 마음이 아파서 나온 소리였다.


처음에는 집 안에 머물며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는 일이 난감해 보였으나, 워낙에 꼼꼼하고 깨끗한 남편은 보란 듯이 척척 잘 해냈다. 다만, 6살 3살 두 아이들을 입히고 씻기고 먹이고 재워야 하는 생활이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기본 생활임을 설득하는 데에는 힘에 부쳐 보였다. 부모는 지금 ㅇㅇㅇ를 해야 할 시간인데, 아이들은 쉽게 설득당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그 이유와 방식을 구구절절 설명하다 못해 납득시켜야 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 나는 실로 엄청나게 행복했다. 아내에서 '남편'이 된 기분이었고, 엄마에서 '아빠'가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며느리의 옷도 벗은 느낌마저 들었다. 남편과 아빠, 사위의 자리를 유토피아의 그 어느 공간에 정해놓을 생각은 없으나- 여성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의 반대편에 선 착각도 들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건, 우리 아이를 양가 부모님, 혹은 타인에게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기 전, 양가 부모님이 아이들을 돌봐주실 때는- 늘 감사하다, 고맙다, 죄송하다는 감정과 말을 몸 안에 품고 살아야 했지만, 남편이 엄마가 되어준 순간부터 나는 그 말에서 해방됐다.  나는 첫 아이가 어린이집 등원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그야말로 친정어머니, 동생, 시어머니, 시누이의 스케줄을 돌려가며 아이 등원을 부탁해야 했다. 친정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도 나였고, 시댁의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도 나였다. '자식'이라는 스타를 남편과 둘이서 탄생시켰는데, 왜 엄마만 매니저처럼 전화를 돌리고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것도 똑같이 일을 하고 있으면서.


엄마로 한 생명을 받아 안았던 시간은 환희와 희열로 시작됐지만 일상에서는 그 환희와 희열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내 몸에서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켰던 그 기다림과 출산의 순간들은, '출산 없이 이 세상의 시계는 1초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져다줬다. 기다렸던 한 생명과의 만남은 삶에 대한 희열과 환희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엄마가 되고 삶에 피로가 누적되면서 나다운 삶을 잃어가면서 '출산의 순간이 멀어지기에 시간도 가는 거겠지'하며 위안을 삼았다. 고통스러워서 엄마의 삶을 여러 번 들여다봤고, 내 삶을 이루는 감정의 파편들을 긁어다가 매일 들여다봤다. 고통이 가장 정확하게 묘사될 때, 그 고통의 무게가 가벼워진다고 했던가. 틈이 날 때마다 휴대전화를 열어, 틈틈이 글을 메모했고, 신문에 엄마 일기를 연재했다.


그 독백과 고민의 흔적은 퇴적물처럼 쌓였는데, 이게 또 글로 푸니 아름다웠다. 글도 사진처럼 스스로를 미화하는 본성이 있어서일까. 결국, 남편의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맞바꾼 이야기를 글로 써서 공모전에서 상도 받았다. 그렇지만 뭐랄까, 좀 짠했다. 글로는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그렸지만, 일상은 여전히 구질구질했다. 우리는 각자 어느 면에서 서로 엄청나게 쪼잔했으며, 틈틈이 서로에게 복수 아닌 복수도 했다.


어느새 우리 사이에 사계절이 두 바퀴를 돌았다. 남편이 6월에 복직을 한다. 얼마 전, 남편과 산책을 하며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나중에 우리 지성이랑 서진이가 커서 아빠가 되면, '얘들아, 아빠는 너희들 키울 때 육아휴직을 쓴 아빠들 중에서도 선구자급이었어. 지금은 너희들이 육아와 가사일 하는 게 너무 당연한 풍경이지만 그 시절만 해도 아니었다. 모든 아빠가 육아휴직을 하던 시절이 아니었어.'"


그 시간으로 훌쩍 여행한 듯 마음이 여유로워졌다.인생은 마라톤이고, 장거리 달리기인데 왜 우리는 단거리 경주하듯 헐떡이며 살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두 아이들에게 2년이란 시간을 통으로 쏟아 부은 남편. 인생의 황금기인 39-40살에 오로지 아빠로 살아준 남편에게 그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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