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호 May 02. 2016

윤동주시인에게 배우는 '슬픔'

'시인 동주'를 읽고(안소영 저/창비 판)

1. 들어가는 말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시 '별 헤는 밤'중)


     모든 노래와 시에는 사연이  있고 의미가 있으며,   의미를 더욱 입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작가의 상황과 환경을 이해해야만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작가와 대화할  있게 된다.  책은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소설로 만들었다. 윤동주의 삶을 소설이라는 장르로 표현하고 중간마다 시를 읽어줌으로써 시의 의미를  풍성하게 가슴깊이 전달해준다.

       이 책을 되짚어보며 함께  생각해 볼 것은 '무엇에 슬퍼해야하는가'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인생을 모두 노트에 기록하였다. 노트의 이름은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였다. 1934년 18살 소년의 감성부터 그의 죽음까지 윤동주의 정신이 노트에 담겨있다. 우리는 그의 노트를 통해 인생의 굴곡을 느끼고 '슬픔'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시인 윤동주가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노래하였는지 살펴볼 것이다.


2. 연희전문학교와 배움

   

    1938년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들이 많은 학교 중에 연희전문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일제치하에서 자유롭게 조선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연희전문학교 정도였기 때문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새로운 길"(시 '새로운 길'중)

        이런 시를 써내려갈 만큼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를 기대했고 배움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여러 수업 중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시간을 가장 열성적으로 수강했다.  하지만 그 설렘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일본이 미국침공을 앞두고 더욱 강경하게 교육을 통제했을 뿐 아니라, 연희전문학교의 여러 강의들이 불순하다는 구실로 교수들을 연행해갔기때문이다. 이 중 최현배교수도 포함되어있었다. 교수들은 연행된 이후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교직원으로 일하는 정도가 다행이었다.  막 입학한 초등학생들이  선생님과 친구에 대한 궁금증과 설레임으로 밤잠을 못이루듯, 윤동주는 설레임으로 날마다 학교를 향했지만 일본은 그런 설레임을 윤동주와 그친구들에게서 빼앗아갔다. 또한 그들이 원하는 교육의 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윤동주는 친구들과 경성한복판의 풍경을 돌아보았다. 조선총독부, 혼부라(백화점), 전발한 여성, 아스팔트로 포장된 혼마차길...  더 이상 내나라가 아닌 광화문거리의 풍경을 보며 누구는 분노하고 누구는 풍자하고 누군가는 슬퍼하였다.


그 이유는 한 가지이다. 그들은 '배움'을 잃어버렸기때문이다.


3. 절망과 희망


     문필보국, 문필로 나라의 은혜를 갚고 충성을 다하겠다는 문인들의 맹세이다. 여기서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닌 일본을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 많은 문인들은 [문예춘추], [문장] 같은 일간지를 탐독하며 유명한 작가들을 동경하였고 그 중 가장 유명한 작가가 '이광수'였다.

그는 신문학 시절부터 민족의 울분과 시름을, 말하듯 쉬운 어투로 쓴 이야기로 달래주었고 작품마다 주제를 담아 그 나름대로 동포들을 계몽했다.(책123p)

     이처럼 이광수는 많은 문인들에게 '희망'같은 존재였지만 그는 문인들에게 '절망'을 선사했다. 이광수는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고 취임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반도 문학의 새로운 건설은 내선일체로부터 출발되야한다." 문인들의 별빛이었던 이광수가 친일앞잡이가 되었다. 이광수뿐만 아니라 윤동주의 노트에 스크랩되어 있던 많은 문인들도 이광수와 같은 배를 탔다.

      윤동주는 자신의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펜을 놓았다. 문인들의 배신, 창씨개명, 황국신민서사...희망이 절망이 된 윤동주는 더 이상 시를 쓰지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노트를 덮고  탐독한 책이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이 책에서 말하는 병이 바로 '절망'이다. 윤동주는 슬퍼하고 절망했다. 그 이유는 '희망'을 잃어버렸기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1년만에 펜을 다시잡았다. 내면의 절망이 풍자와 탄원으로 표현되기도했다(팔복). 그러나 이내 분노와 슬픔이 승화되어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시 '십자가'중)

라고 노래했다. 그는 스스로 말했을 것이다.


자신은 '희망'이 되겠다고.......



4. 윤동주의 죽음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6개월 앞두고 윤동주는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은 세계2차대전으로 조선인 징병을 시작했고 윤동주는 징병을 피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선진문화교육을 위해 고민과 고심끝에 일본유학을 선택했다. 윤동주의 유학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교토제국대학을 지원했으나 송몽규만 합격하고 윤동주는 진학을 실패했다. 그래서 릿쿄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수업시간에 전공공부보다 시쓰기를 즐겨하다가도 수업 중 징병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교수와 언쟁을 하기도하며 나라의 비참함을 슬퍼했다. 이런 모습과 항일운동을 준비하는 친구들로인해 윤동주는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이후 독립을 위한 배움과 동료들의 움직임들로 인해 일본경찰에 의해 지속적으로 관찰받았고 결국 일본경찰에게 사상범으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그는 모든 노트와 서적을 빼앗겼고 취조받았다. 일본인들은 윤동주를 취조하면서 노트를 확인하려했으나 조선어를 몰라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동주에게 그의 시를 모두 일본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하였다. 윤동주에게 노트는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 속에 가득 채워져있는 시는 무엇이었나. 바로 윤동주의 삶이자, 윤동주 '그 자체'였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한글'과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한 줄 한 줄 읽어간다는 것은 그에게 '죽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구타와 고문에도 의식을 잃지않았던 윤동주가 그의 시를 모두 빼앗기면서 삶과 의지도 모두 빼앗겼다. 그는 그가 지키고자한 조국의 언어와 시를 빼앗기며 죽음 아닌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그는 2년의 징역선고 후 후쿠오카 수용소로 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으며 그곳에서 생체실험대상이 되어 1945년 2월16일 싸늘한 죽음을 맞이했다. 윤동주는 죽기전 '어머니'를 부르며 슬픔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이 슬픈까닭은 생체실험대상으로  억울한죽음을 맞이한 이유일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가장 사랑한 조국의 '언어'와 '시'를 빼앗겼기때문이다.


5. 나가는  말


      책 '시인동주'를 통해 윤동주에게서 슬픔을 배웠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라잃은 슬픔이며, 정신과 얼을 상실한 슬픔이며, 스스로의 길을 흔들리며 걸어가는 부끄러움에대한 슬픔이다. 윤동주는 배움과 희망과 언어와 시(정신)을 약탈당했다.

     슬퍼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킬 것이 있다는 것이다. 슬퍼한다는 것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슬퍼한다는 것은 우리가 되찾아야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 한번 질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할 것이 무엇이며, 희망하는 것이 무엇이고, 되찾아야할 것이 무엇인지... 윤동주가 슬퍼한 것은 그의 애국심과 절망하며 흔들리는 부끄러운 자신에게서 시작된다. 우리는 한 나라의 국민과 시대의 주체들로서  무엇을 희망하며 지켜야하는지 되물어가며 자화상을 그려가야할  것이다.

      작가는 시를 빼앗긴 윤동주를 '죽은 윤동주'로 묘사한다. 지금도 빼앗긴 역사, 문화, 정신이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상태인가?  또 우리는 무엇을 슬퍼해야 할 것인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시 '팔복'중)

     



매거진의 이전글 '읽음'의 가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