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신영복 저/돌베게 판)
2016년 1월 15일, 시대의 지성 신영복 교수가 피부암으로 별세하였다. 커다란 정신의 별이 되어버린 고 신영복 교수... 그의 저서는 대한민국 지성에 다시 한 번 향수를 일으켰고 순식간에 몇 주간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켜왔다. 나도 이런 붐에 덩달아 서점에서 그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쥐어들었고 신영복교수의 담담하고 초연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책은 20년간 감옥생활을 한 고 신영복 교수가 가족들과 엽서를 통해 나눈 대화를 모은 것이다. 그는 책에서 다산 정약용의 유배생활이 목민심서라는 걸작을 남긴 '창조의 시공간'이 된 것을 매우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의 감옥생활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걸작을 통해 '창조의 시공간'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수많은 사색과 교훈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중 '읽음'이 주는 가치에 대해 재고해보려고한다.
먼저 시대의 정신을 향유하는 많은 사람들이 겪고있는 잘못된 '읽음'에 대해 반성해볼것이며 다음으로 우리가 지향해야할 '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기시켜볼 것이다.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릿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은 것입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39p)
대학교 시절 많은 책들을 읽다보면 나보다 학점이 낮은 친구들, 나보다 책을 덜 읽는 친구들, 그리고 각종 발표나 토론에서 호되게 당하는 친구들을 지레 무시하곤 했다. 그들을 향한 나의 지식은 신영복교수가 말하는 '촌놈 겁주는'오만의 감투가 되기도 했다. 함께 조별 발제라도 있는 날에는 나와 함께 과제를 준비하면 안되겠냐고.... 조심스레 부탁하는 친구들을 보며 왠지 모를 '우월감'에 취해 있기도 했다.
어느새 지식은 한 사람을 더 세련되고, 교양있게 보이도록 도와주는 악세서리가 되었다. 더 많이 아는 것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척도가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은 지식이 가져다주는 폭력성 앞에 무릎을 꿇기도 하고, 지식이 가져다주는 중독성 앞에 오만해지기도 한다. 정작 이런 분류의 사람은 '노동의 현장'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못하는 처참함을 경험하지만 당장의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망상에 취해 오만의 감투를 쓰게 된다. 오만은 나와 상대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 오만과 편견'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잘못된 '읽음'은 나와 상대를 단절시키는 흉기(폭력)가 된다.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는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같은책,85p)
위 문장은 우리가 지향해야할 '읽음'에 정수가 되는 문장이다. 모든 읽음은 사색과 실천을 전제로 시작되어야한다. 실천에 대한 부분은 조금 후에 다루기로 하고 사색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대학시절 조직신학 시간만 되면 교수님께서 노트에 항상 적으라고 했던 고사성어가 있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책을 읽기만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허망하고, 생각만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이다. 즉 읽음과 사색은 서로 상승적인 관계여야만하고 그 중 하나라도 등한시되면 허망하거나 위태롭게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대학수업시간에 늘 의미없이 노트에 끄적였던 고사성어가 나에게 '살아있는 문자'로 다가왔다. 이제서야 고사성어를 올바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많이 읽는 것만으로 자신의 교양과 지식에 만족한다면 '나'와 아무상관없는 사변적 지식만을 헛간에 쌓고있는 것이다.
사색을 통해 우리의 몸에 체화된 지식은 '삶의 자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며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은 행동 하나에서도 값진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견인할 것이다. 많은 책을 읽기에 바쁘고, 많은 지식을 조그마한 머리에 쑤셔넣기에 너무 바쁜 공부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과감히 책을 덮어야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관련된, 우리의 삶에 밀접한 지식을 곱씹어 내 몸의 양분으로 체화시켜야한다. 그것이 사색이 주는 즐거움이며, 책뿐만 아니라 삶을 읽는 방향이다.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인식에서 이성적인식으로 발전해나갑니다. 그러므로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결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그것은 곳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고, 발전하지 못하는 생각이 녹슬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같은책,277p)
앞서 확인했듯이 사색은 실천으로 연결되어야한다. 생각만 많이 하고 아무런 실천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식의좌절, 사고의 정지'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시 오만의 감투로, 지식의 악세사리로 금방 전락해버릴 것이다. 지식의 본질은 우리를 움직이게하는 힘이며, 실천은 지식의 가치를 확인하는 길이다. 특히 신학을 전공한 나와 주변사람들의 경우,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신학의 적용에 있어서 한번쯤 고민을 하게된다. 내가 배웠던 조직신학, 성서신학을 설교 안에서 어떻게 녹여낼 수 있을지, 그리고 사역과 삶의 실천 속에서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이기에 사변적 지식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설교 이외에 여러 잡무를 하는 부사역자의 경우 못을 박고 공구를 다루는 일들, 운전하는 기술, 컴퓨터문서를 작업하는 능력이 더 필요할때도 있지않은가? 신학교에서 많은 지식을 배웠지만 당장 나에게 어떠한 실천도 요구하지 못하고 견인하지 못하는 그 지식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나'와 무슨 연관이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지 고민하기 위해 읽는다. 그것은 비단 책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내 옆사람을 읽고, 자연을 읽고, 세계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읽어낸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조금더 나은 삶으로 인도해준다면, 오늘도 새로운 한 가지를 실천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살아있는 지식'이 되는 것이다.
"팬지꽃이 그 작은 꽃봉지를 열어 벌써 여남은 개째의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한 줌도 채 못되는 흙속의 어디에 그처럼 빛나는 꽃의 양식이 들서있는지.... 흙한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꽃한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5월의 창가에서 나는 팬지꽃이 부끄럽습니다."(같은책, 151p)
창가에 있는 작은 팬지꽃을 보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고 신영복 교수, 그는 본인뿐만 아니라 위 글을 읽고있는 우리 스스로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린다. '흙한줌'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가치는 세상 어느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숭고함, 자연의 위대함, 꽃을 피우는 노력에 대한 숙연함을 전해준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도 생명하나 살리지못하고, 시대를 계몽하지 못하고, 학생하나 가르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슬퍼하는 신영복교수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우리도 얼마나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가?그리고 얼마나 방대한 지식의 인프라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지만 정작 그 속에서 우리를 움직이게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읽는것 중에 나를 고민하게하고, 산통을 겪게하며 나를 움직이도록하는 '그 무언가'가 가슴 속에 있는가? '읽는다는 것'의 가치는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증명된다.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읽음은 머리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으로 읽고 몸으로 살아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한 글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삶과 삶 사이를 읽어낼 수 있는 '읽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