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호 Sep 01. 2018

시인 윤동주의 삶과 ‘부끄러움의 영성’

1. 들어가는 말


     ‘한컴타자’로 매일 연습하던 ‘별 헤는 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던 나에게 먹먹하게 다가왔던 추억이 있다. 별 하나에 사랑과 추억과 어머니를 그리는 ‘별 헤는 밤’을 읽고 있노라면, 눈을 감고 밤하늘에 가득히 수놓인 별들을 떠올리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그는 자기를 치장하여 거짓으로 과시하기 바쁜 현대인들에게 잠잠히 자기를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인이다.

     특별히 우리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통해서 ‘신앙인의 자세’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신앙을 돌아보는 과정에 있어서 시만큼 유용한 도구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을 표현하는 언어 중에 ‘시’만큼 풍성한 표현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고진하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종교 언어의 원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푸르고 장엄한 시의 숲이 일렁입니다. 시의 나무들로 울울창창한 숲을 신이 산책하고 계시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와 종교는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신비하고 경이롭고 모호하고 불가사의한 세계는 시적언어가 아니면 표현할 길이 없으니까요. 시와 예술은 숱한 고정관념과 타성 당연의 세계를 깨뜨릴 힘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시 정신, 예술정신을 갈무리한 종교는 현실을 변혁할 힘을 갖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본 글을 통하여 윤동주의 삶과 시를 살펴볼 것이다. 우선적으로 그의 고향에서의 생활, 중등교육의 생활을 통하여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학생 윤동주에게 신앙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연희전문학교에서 겪게 되는 절필기를 중심으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신앙이 윤동주에게 주었던 영향력을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절필기 이후에 기록된 윤동주의 시를 통해 윤동주에게 배울 수 있는 신앙인의 자세를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특별히 그의 신앙을 ‘부끄러움의 신앙’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2. 윤동주의 학창시절


2-1) 윤동주의 고향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은 먼 북간도에 계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윤동주의 고향은 ‘북간도’이다. 지리적 위치로는 두만강 이북 만주지역을 ‘북간도’라고 한다. 윤동주일가는 그의 증조부, 윤재옥부터 윤동주까지 4대가 거쳐 북간도에서 살았다. 특별히 북간도에서 당시 ‘맹자’를 ‘만독’이나 했던 규암 김약연학자를 중심으로 4명의 학자들이 ‘명동마을’을 만들었다. ‘명동’의 뜻은 ‘동국을 밝힌다.’라는 뜻으로 당시 중심인 ‘중국’의 동쪽에 있던 ‘조선’을 밝히고자하는 학자들의 염원이 담겨있었다. 이들은 척박한 조선 땅을 팔고 기름지고 넓은 땅에서 살아보자는 염원과, 집단으로 들어가 간도를 조선의 땅으로 만들고자하는 야망과 기울어가는 나라에 인재를 만들자는 희망으로 ‘명동마을’을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을 조금씩 나누어 ‘학전’을 만들었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물은 후학을 양성하는 밑거름으로 사용했다.

     명동마을은 기본적으로 ‘유교 문화’를 근간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 지역에 사는 아이들은 높은 교육열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마주했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나아가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더 이상 ‘구학’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동마을의 주민들은 ‘신학문’을 일으켜야겠다고 결의했으며 그 일환으로 ‘명동학교’가 만들었다. 여기서 ‘신학문’의 선생인 정재면이 등장한다. 정재면은 애국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의 젊은 지사였다. 그가 명동학교에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전제조건을 하나 내건다. 그것은 바로 정규과목에 ‘성경’을 가르치고 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이다. 명동학교는 이를 승낙하고 명동마을은 기독교와 신학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명동마을은 자연스레 유교문화와 기독교문화가 섞여서 공존하는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명동마을은 일본이나 청나라의 간섭에 조금은 자유로운 지역이 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들어온 곳은 유럽열강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의 세력은 점차 커졌고 1910년에는 한일합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명동마을에 일본 이외의 위협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공산주의였다. 청나라가 쇠하며 중국의 공산당, 그리고 소련의 공산주의는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북간도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었다. 공산주의는 가난한 농민들과 빈곤층에게 유토피아를 심어주었다. 윤동주에게 가장 영향력을 많이 주었던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사촌형인 송몽규도 공산주의를 지지했다. 그래서 그는 마을의 공개적인 자리에서 기독교를 조롱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웅변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과 달리 윤동주 일가는 공산주의의 테러로 인해 15km 떨어진 용정으로 이주했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송몽규는 테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을 일으킨다는 명분으로 공산주의를 지속적으로 지지했고 중국으로 가서 공산당에 들어가기를 결심했다. 하지만 점점 더 거세지는 공산당의 테러는 명동마을의 기독교신자들을 죽이고 명동학교를 인민학교로 바꾸며, 선생들을 죽였다. 송몽규는 공산주의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고 인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념에 회의감을 가지며 공산주의에서 돌아서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윤동주는 공산주의 때문에 ‘고향’과 ‘학교’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2-2)윤동주의 중등교육과 신앙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이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서 중등교육을 시작한다. 이 은진중학교 시기에 윤동주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송몽규는 <술가락>이라는 작품으로 ‘꽁트부문’에서 수상을 한다. 당시 ‘문학소년’이었던 윤동주입장에서 ‘사회운동가’였던 송몽규의 행보는 ‘열등감’을 키워주는 요소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윤동주도 자신의 작품을 기록하기로 다짐한다. <초 한 대>라는 작품이 그의 첫 작품인데 여기서 윤동주가 ‘기독교의 영향’을 막대하게 받은 사실이 보여진다.


<초한대>

초 한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중략)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생애 첫 시 1934.12.24.


    당시 중등교육은 4년제와 5년제로 구분되었다. 5년제는 4년제에 비해 고등교육(오늘날 대학교육)에 진학하기 유리하였다. 윤동주의 은진중학교는 4년제였기에 평양에 있는 5년제 숭실중학교로 편입을 결심한다. 왜냐하면 송몽규에게 여전히 자극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4학년 때 숭실중학교로 편입을 하는데 여기에서 또 한 명의 윤동주 친구인 문익환이 등장한다. 문익환은 숭실중학교에 이미 진학하고 있었다. 윤동주는 문익환보다 스스로 다방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문익환과 동일한 학년인 4학년으로 진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숭실중학교는 윤동주를 3학년으로 편입시켰다. 여기서 윤동주는 또 한 번의 ‘열등감’을 경험한다. 숭실중학교는 윤동주가 편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사참배강요가 일어났고, 윤동주는 신앙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저항했다. 그리고 이내 학교를 퇴학한 후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용정중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쳤다. 윤동주의 중등시절을 종합해보면 ‘열등감’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시기마다 윤동주는 신앙으로 ‘열등감’을 이겨낸 것으로 볼 수 있다.   


3. 윤동주의 절필기와 이후의 ‘시’


     윤동주는 중등교육을 마치고 자유롭게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진학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로 진학을 결정한다. 그 이유는 ‘연희전문학교’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이기 때문에 일본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는 윤동주의 마음은 그의 시 <새로운 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5.10


    윤동주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연희전문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한국어와 문학을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런 시기도 얼마 지나지 않아 1939년 11월 창씨개명령이 공포되었다. 2학년 말 윤동주는 창씨개명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안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연희전문학교’에도 일본의 개입이 시작되었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모든 교수는 교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940년 4월부터 창씨개명령은 더욱 강력해졌고 결국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통해 ‘히라누마 도주’로 개명했다. 또한 동시대 모든 문인들의 우상이었던 ‘이광수’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한국문학의 근대화를 ‘무정’이라는 작품으로 열었던 그가 “반도문학의 새로운 건설은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로부터 출발되어야한다.”라고 말했다. 윤동주에게 이 시기는 복합적인 절망으로 다가왔다. 교육의 기회를 빼앗겼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빼앗겼고, 동경하는 희망을 빼앗겼다. 윤동주는 끝없이 절망하였고 결국 신을 원망하였다.  

    결국 연희전문학교 3학년 시기동안 ‘절필기’를 가진다. 그리고 신앙생활 또한 회의감에 가득차서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그는 ‘절필기’동안 한편의 시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저 단 한권의 책을 손에 집어 든다. 그 책은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윤동주는 키에르케고르를 통해 절망을 배웠고 이것을 극복해내는 방법 또한 배웠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자면, 절망은 ‘자기 상실’이다. 즉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알 수 없으며, 이것은 인간의 ‘정신적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의미에 대해서 늘 고민한다. 그리고 고민할 때마다 회의감에 빠진다. 왜냐하면 자기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해서 우리는 늘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회의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관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한다. 하지만 관계는 언제나 유한한 것이어서(그것이 사람이든 물질이든) 곧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 절망하고, 나에게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들이 ‘유한한 것’이어서 절망한다. 윤동주도 학창시절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가능성에 절망하였다. 나아가 윤동주도 고향을 잃었고, 나라를 잃었으며, 학교를 잃었고, 우상을 잃었고, 이름을 잃었다. 즉 윤동주는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해주는 모든 관계에서 의미를 상실했다. 윤동주는 더 이상 윤동주가 아니었다. 그는 절망했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그 두 번의 절망이 곧 기회라고 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두 번의 부정(이중부정)은 자기에 대한 긍정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긍정하는가? 바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기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받아들일 때, 세상에서 나의 가치가 아무것도 아님을 받아들일 때, 그저 슬퍼할 수밖에 없을 때, 오직 그때에만 인생의 희망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인간이 모든 관계와 세계에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발견하는 자기자신은 영원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간은 자기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 분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 앞에서만 인간은 ‘신 앞의 단독자’로서 자기 자신의 의미를 명확히 할 수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자기의 연약함 그대로를 긍정할 수 있으며, 절망과 불안으로부터 자유, ‘구원’을 경험한다.


     절필기를 끝내고 그가 처음 적은 시는 마태복음5장의 팔복을 모티프로 한 <팔복>이라는 시이다.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1940년 12월-


     원래 그의 ‘육필본’을 보면 ‘위로받을 것이요’라고 적었다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고 고쳐 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위로가 아닌 슬픔을 선택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을 원망하고 탄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윤동주는 1년의 ‘절필기’를 통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통해서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의 슬픔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앞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설명한 것과 같이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일 때에만 하나님으로부터 부족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일 때에만 연약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해서 끝없이 함께 슬퍼할 때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5개월 후 그는 신앙을 모티프로 유명한 <십자가>라는 시를 쓴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0년 5월-


    그는 이제 슬퍼하는 자들과 영원히 슬퍼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할 것을 각오하였다. 그리고 겸허하게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자신의 모가지를 드리우겠다고 고백한다. 이제 그는 현실을 탓하고 세계를 탓하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절망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절망을 받아들이고,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신앙인으로서 어두운 시기를 묵묵히 걸어갈 것을 다짐한다. 피를 하늘 밑에 흘리겠다고 말하는 그의 순교적 정신은 당시 심사참배를 동의하던 한국교회와 대조되는 예언자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1940년 11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그의 시집을 편찬하려고 준비한다. 익히 잘 알려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그 시집의 <서시>가 1940년 11월에 기록된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가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0년11월-


      윤동주는 부끄러움이 없는 삶은 원했지만 부끄러움이 너무나도 많은 자신의 현실을 직면했다. 윤동주는 고고한 삶이 아닌 현실의 자신을 인정하고 표현한다. 창씨개명을 하고, 열등감에 휩싸인 부끄러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을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부끄러움을 직면했기 때문에 ‘별’을 노래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순’에 직면한 사람만이 하늘을 소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처한 위치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한다.


4. 윤동주의 신앙과 부끄러움의 영성


    윤동주의 신앙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부끄러움의 신앙’, ‘부끄러움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누구보다 아파했고 슬퍼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 대한 자기모순은 결국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으로 윤동주에게 다가왔다. 윤동주의 절필기 1년은 이 ‘자기모순’, ‘부끄러움’에 대한 절규의 시기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윤동주는 이 부끄러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 내면에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승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신앙’이 감당한다. 한글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창씨개명을 한 모습, 일제강점기에 시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모습, 자신의 무능을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회피하였던 모습을 이제 그는 덤덤히 받아들인다. 여전히 부끄럽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는 그의 다짐(‘서시’ 내용)은 우리가 윤동주를 신앙의 선배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제 그는 종탑위에 걸린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직면함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 있는 희생양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한다.(‘십자가’ 내용)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부끄러움’이라는 ‘선물’을 마주해야한다.

     성경에서 ‘부끄러움’과 관련하여 두 인물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아담이다. 우리는 아담의 타락이후 그가 가장 처음 겪은 감정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모두 다 안다. ‘부끄러움’은 죄의 저주라고 통상적으로 이야기하지만, 나는 ‘선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부끄러움’없이 ‘죄’를 직면하고, 신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담은 그 부끄러움을 회피하고, 자신의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한다. 오직 부끄러움을 직면한 사람이어야만 진실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아담과 대조되는 한 명의 인물은 다윗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였고 우리아를 사지로 보내어 간접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그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에 직면한 자이다. 그래서 시편51편을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께 ‘정직한 영’을 간구하며 회개한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회피하거나 왜곡하여 합리화시키지 않도록, 하나님의 정직한 영이 자신의 죄를 직면하게 이끌어줄 것을 기도한다. 다윗은 ‘왕’이라는 권력이 있음에도 부끄러움을 합리화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구원’의 첫 시작을 ‘중생’(거듭남)이라고 한다. 이 중생의 단계에 필수적인 과정이 바로 ‘회개’이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에서 회개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회개 없는 복음도 있을 수 없다. 회개가 무엇인가? 회개는 바로 자신의 부끄러움에 직면하는 것이다. 시대가 갈수록 현대인의 심령은 바로와 같이 ‘강퍅’한 심령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자기를 치장하고 왜곡하여 양심은 무뎌지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지 못한다. 합리화는 심해져가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옳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어간다. 부끄러움은 부정적 감정이라고 치부해버리고 급하게 외면하기 바쁘다. 그래서 현대인에게는 윤동주의 ‘시’가 필요하다. 그리고 신 앞에서 ‘단독자’로 서있는 윤동주의 모습을 통해 ‘부끄러움’을 직면하는 태도를 배워야한다. 그는 신 앞에서 자기 내면의 진통을 겪어내었으며 더 숭고한 각오와 결단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5.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윤동주의 삶과 그의 시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할 신앙의 자세를 살펴보았다. 윤동주의 고향과 학창시절이 그의 신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무엇을 희망하였고, 일제강점기를 통해 얼마나 절망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나아가 절망 속에서 멈추어있는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우는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절망에서 희망을 얻는 답을 성찰해보았다. 부끄러움을 직면하는 것, 신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자신의 삶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신앙인의 면모이다. 자신을 왜곡하고 합리화하여 만들어낸 거짓과시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만의 시를 써야할 것이다. 우리의 <자화상>을 써내려갈 수 있다면 우리는 절망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넘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참고자료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경기 : 범우사, 2014)

송우혜, 『윤동주평전』(서울 : 서정시학, 2016)

김응교, 『처럼』(경기 :문학동네, 2016)

안소영, 『시인동주』(경기 :창비, 2015)

고진하, 『시 읽어주는 예수』(서울 : 비채, 2015)

매거진의 이전글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