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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혁 Oct 19. 2017

반려견 통역기

장편추리소설 3

그날 따라주인님이 몸이 힘들어서 몸져 누워있었는데 주인님 자식인 고양이 얼굴이 아파트로 찾아왔다. 


놀란 주인님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고양이 얼굴은 들어와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물론 내가 그 고양이 얼굴이 하는 인간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언제나 주인님의 아파트에 올 때 같이 오는 인간 아이가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이 인간의 냄새를 기억하려고 코를 킁킁거렸다. 소의 우유 냄새와 신선한 풀냄새가 섞인 아이 인간의 냄새를 기억해 내는데 별 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주인님은 고양이 얼굴이 하는 울음 섞인 말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괘씸하기 그지없는 고양이 얼굴이지만 주인님이 저렇게 마음이 아파하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분명 인간 아이의 일일 것이다. 


혹시 저 고양이 얼굴이 인간 아이를 픽업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잠깐 어디 들렀다가 고양이 얼굴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인간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 고양이 얼굴이 아이를 이곳 아파트에 잠시 내려놓는 순간도 싫어하는데 저렇게 오랫동안 여기 있을 턱이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고양이 얼굴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문턱에 오랫동안 서서 울고 불고 밤새도록 있다가 되돌아 갔다. 주인님은 고양이 얼굴을 보내고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주인님의 뒷모습에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애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애잔함이 평범한 슬픔과 다른 점은 애잔함이 슬픔보다 더 깊은 고통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애잔함의 대상은 낯선 대상이 아니라 깊이 사랑하는 대상이라서 그렇다. 나 같은 개들은 주인님이 되는 인간들과 애잔함이 깃든 깊은 관계 속에 있다. 


주인님에 대한 충성심이 깊을수록 주인님이 손쓸 수 없는 슬픔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 아픔이 고스란히 나에게 도 전달 된다. 


나는 조용히 꼬리를 흔들면서 다가가 주인님의 다리를 비벼댔다. 주인님은 나를 바라보지 않고 계속 창문 밖을 응시하면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분명 인간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주인님의 손끝의 감정이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의 육감에 그 슬픈 감정이 그대로 내려와 앉았다. 


새깃털처럼 가볍지만 내려오면 육중한 무게로 어깨를 짓누르는 그 슬픔이 그대로 내 마음에 전달되었다. 그다음 날에 인간아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 그다음 날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에 문소리만 들리면 나는 혹시 그 인간 아이가 아닐까 바라보았다. 문밖으로 무슨 소리만 들려도 나는 문에 다가가서 문을 열려는 듯 긁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인간아 이는 결국 주인님과 나의 공간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주인님 다음으로 인간에게 정을 부었던 인간 아이가 나타나지 않자 몇 개월은 공허함에 미칠 지경이 되었다. 


주인님이 있어야 하는 개들에게 충성의 대상인 인간들이 사라지면 공허감이나 허무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도저히 가만히 바닥에 누워있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허무주의는 또 다른 이름의 무신론이다. 


나 같은 개가 무신론을 거론하니까 우스운 모양인데 모든 개들 (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은 작은 애완견들은 제외하고 )에게 주인님은 모두 다 신神이다. 개가 원하는 것을 다 주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관계로 맺어져 소통하고 사랑을 나누는 살아있는 신과 피조물의 관계이다. 


인간 아이도 나타나지 않자 고양이 얼굴도 함께 종적을 감추었는데 얄미운 고양이 얼굴이지만 주인님이 너무 힘들어하시니 고양이 얼굴도 보고 싶어 졌다. 주인님의 성격을 알기에 나는 멀찍이 다가가지 않고 누워 주인님의 눈치만 살폈다. 주인님은 나와 아침산책을 한 뒤 집에 들어와서는 하루 종일 멍하니 창문 밖만 바라보았다. 일주일에 한 번 차를 몰고 마켓을 갈 때도 평상시 운전하면서 부르던 휘파람도 멈추고 화가 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살얼음을 걷는 듯한 나날이 얼마나 흘렀을까. 


주인님의 얼굴이 환하게 피는 일이 일어났다. 


주인님을 따라 어느 한 장소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나 같은 개는 인간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주인님과 동행하는데 제약을 많이 받는데  그곳은 인간들이 개들과 같이 함께 모이는 아주 근사한 곳이었다. 


사실 우리 개들은 주인님이 정해지면 주인님만 바라보고 신경 쓰는데 그곳에 모인 개들은 자신의 주인들 뿐에게만 아니라 동료 개들에게 모두들 주인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듯 다들 아주 친근하고 다정했다. 옆에 나보다 종족이 천한 계급인 삽살개에게 물어보니 이 곳은 인간과 개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대화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그런 장소라고 대답했다. 


지능이 조금 낮아서 이 장소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못했지만 분위기로 봐서 나나 주인님에게 필요한 교제 장소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야 주인님만 건강하고 잘 계시면 그것으로 만족인지만 인간인 주인님은 그래도 같은 인간들과 담소도 나누어야 된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장소를 어떻게 알고 찾게 되었는지 알 순 없었지만 주인님이 시간이 갈수록 이 곳의 인간들과 웃고 즐기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내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나는 이 곳에서 주인님이 사라진 인간 아이와 고양이 얼굴을 잠시라도 잊고 같은 또래의 많은 인간들과 자주 교제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주인님이 그래야 건강과 활기를 찾고 나에게 애정을 더 많이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주위의 인간들과 같이 온 다른 개들도 다들 기분이 좋아 흥분되는지 연신 혀를 널름거리면서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런 흥분의 도가니가 만들어진 이유는 안 물어봐도 그들의 주인들이 다기분이 좋다는 증거이다. 


개들은 주인이 기분 좋으면 같이 기분이 덩달아 좋아진다. 


가끔씩 인간들이 서로 반목하고 다투는 이유는 그들의 주인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이나 개들이나 마음 한구석에는 주인님을 모시는 공간이 반드시 있다. 만약 주인님이 있어야 할 그 공간이 텅 비어 있으면 불안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길에 버려진 개들이 다들 그렇다. 주인에게 버려지고 주인이 없어 슬픔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고 분노와 광기만이 주인 없는 개들의 입에선 끊임없이 흘러넘친다. 주인이 없는 삶과 주인이 있는 삶의 차이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주인이 없는 삶이 지옥이라면 주인이 있는 삶은 천국이라는 완전한 차이이다. 주로 종족번식을 위해 동침을 하는 개들에게 삶의 낙이라면 오로지 주인님이 있냐 없냐는 이유로 나누어진다. 


주인님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주인님이 괴로우면 나도 괴롭다. 주인님이 외로우면 나도 외롭고 주인님이 절망하면 나도 절망한다. 주인님이 유쾌하면 나도 유쾌하고 주인님이 웃으면 나도 짖는다. 


이것이 주인님이 있는 개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는다면 십중팔구 삶이 불안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분노하게 된다. 나는 주인님과 멀찍이 떨어져서 주인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간 아이가 사라진 뒤 처음으로 듣는 주인님의 웃음소리였다. 각자 개들을 데리고 온 다른 많은 사람들주과 한 데 어우러져 웃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렇다. 주인님은 내 가 대신해주지 못하는 인간만이 메워줄 수 있는 갈증을 느꼈던 것이다. 주인님이 대화할 다른 인간이 절실히 필요했었구나 생각하니 그것을 일찍 헤아리지 못한 나에게 자괴감이 몰려왔다. 


내가 이러고도 주인님의 반려견이라고 말할 수 있나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성격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코커스 패니얼종의 개 한 마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코커스 패니얼 종은 워낙 도도한 종의 개라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는데 희한하게도 다정한 얼굴로 나에게 어느 주인을 따라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자괴감에 괴로워 대꾸하기 싫어 질문을 못 들은 척 외면을 하고 있는데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다는 듯이 멀뚱이 오랫동안 내 앞에 서있어 마지못해 나의 주인님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알려주면서 나는 그 암컷이 자랑하듯 뽐내는 황금빛깔의 윤기 나는 멋진 털을 힐끔 훔쳐보았다. 그 암컷의 주인은 부자라는 것은 단박에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코커스 패니얼은 자신의 주인이 인간 여자라고 덧붙이면서 은근한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순간 코커스 패니얼이 지금 발정기 때라는 확신이 나의 가슴을 후려쳤다. 


요즘은 인간과 같이 지내는 반려견들이 거세하는 것이 인간들의 법으로 정해져 있어 대부분 수컷이고 암컷이고 거세를 하는데 나는 아주 어릴 때 거세를 했었다. 그런데 내 앞의 코커스 패니얼은 거세를 하지 않았는지 계속 자신의 혀를 날름거리면서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발정 난 개는 아무도 못 말린다. 


시도 때도 없이 발정 하는 인간들과 다르게 개들은 어느 기간 동안 종족번식을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발정기를 가진다. 거세되어 그 기분이 어떤지 확실히 모르지만 관계를 가지는 개들의 신음소리를 듣거나 그늘진 구석에서 서로 개들 이교 접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 교접이야 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고 교접 후 아름다운 작은 생명의 열매를 거두는 숭고하고도 장엄한 일이 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은 그 숭고하고 장엄한 교접을 한낱 야만적인 행위로 폄하하기도 하는데 그건 교접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교접은 생명체와 생명체가 서로 만나 사랑을 확인함과 동시에 열매를 맺는 결과를 가지는 일련의 작업이며 일종의 거룩한 예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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