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약속. 아무말 대잔치.
호주에 와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융통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곧 기회비용을 지불하는 행위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한 사람에게 집중한다는 의미. 그래서 약속이 깨졌을 때 얻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날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
여기서는 그런 건 거의 없다. 어떤 약속이 사라졌다고 한 들 휴식이란 기회로 치환할 수 있으니까. 크게 따지지는 않는 편.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약속을 깨야되겠다며 걸려온 전화. 받는다. 그녀가 말한다. 약속을 깨야 한다고. 가장 여유있는 주말에 깨는 약속. 허탈하다. 그래도 덤덤히 넘긴다. 말 그대로 손해본 것이 거의 없기 때문.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결정이다. 자신의 시간, 열정, 능력을 한꺼번에 쏟아부어야 하니까. 여기서는 당위와 현실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그 일이 자신의 신념을 위한 것인지 현실적인 도움을 위한 것인지 잘 구분해야 한다는 의미. 그 친구가 약속을 깬 이유는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의 고민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얘긴 할 수 없지만 이 글을 직접 읽는다면 알아서 문의하겠지.
붕 뜬 시간은 휴식으로 대체한다. 룸메이트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간다. 신기한 건 잠이 쏟아지다가도 운전을 하게 되면 깨어난다는 점이다. 피곤이 악착같이 덤벼도 운전대는 효과적으로 뇌를 방어해낸다.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는 뇌도 일을 하는 것 같단 말이지.
오래 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새벽 3시. 다시 일을 나간다. 이제 얼마 안남았다. 귀국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