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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이방인 May 31. 2017

보랏빛 향기 가득한 계절

찬란한 5월

유채의 샛노란 물결이 희미해질 무렵 이곳저곳 보랏빛 향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왠지 낯설다, 이 풍경, 이 향기.

그들은 매년 이 시기를 나와  함께 했으나 내 눈이 이제야 그들을 향해 열린 것일까?


보랏빛이라 하면 단연 라일락을 빼놓을 수 없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한국의 라일락은 송이를 이루는 각개 꽃들의 크기가 비교적 작았던 것 같다. 하여서 포도송이에 비유하기엔 다소 빈 틈이 많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 주위를 맴도는 향기는 중독적이며 임팩트가 있었다.


이곳의 라일락은 유럽인의 체구를 닮은 양 송이마다 잘 익은 통통한 포도가 연상될 만치 풍채가 튼실하다. 튼실한 꽃송이에 비해 정작 나무의 키는 대다수 아담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라일락 나무가 이 나라에 심기기 시작한 시기가 꽤 가까운 과거와 맞닿아 있는 건 아닐까? 나무의 체구가 작은 탓인지 큰 꽃송이에 비해 후각을 자극하는 힘도 비교적 부족한 느낌이다.


라일락을 제치고 올 들어 부쩍 보랏빛 존재감이 돋보이는 꽃이 있다. 내가 무척 좋아하지만 예년에는 내 주변에서 쉬이 발견할 수 없던 등나무 꽃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올해는 동네마다 곳곳에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꽃인양 의기양양해 보이는 그 보랏빛. 땅을 향해 포도송이처럼 풍성하게 늘어진 꽃들, 여러 송이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외로워 보이지 않아 보기에도 참 좋다.

은은함이 맴도는 꽃 빛깔이라 얕본 걸까? 그들의 향기는 예상보다 강열하다. 그러나 거슬리지 않게 적당한 정도로 후각을 즐겁게 자극해온다. 혼자서가 아닌 여럿이 합동해 이루는 시너지 때문일 듯싶다.

 

평소 딱히 애정 하지 않았던 보라색이 올따라 유난히도 눈에 띠는 이유는 뭘까? 갑자기 선호 색상이 바뀐 것도 아닌데?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크고 작은, 익숙하거나 또는 이름조차 모르는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보라 빛깔을 입고 생글생글 웃는다.



학창 시절 한창 히트일 때도 썩 즐겨 부르지 않은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가 무의식 중에 입술 밖으로 춤을 추듯 리듬을 타고 흘러나온다. 


"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예쁜 두 눈에 향기가 어려 잊을 수가 없었네


언제나 우리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얘기들을 만들어 가요


외로움이 다가와도 그대 슬퍼하지 마

답답한 내 맘이 더 아파오잖아


길을 걷다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대 나에게 사랑을 건네준 사람


길을 걷다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대 나에게 사랑을 건네준 사람


사랑을 건네준 사람

사랑을 건네준 사람"


몇 구절 흥얼대며 기억 밖으로 무의식 중 튀어나오는 걸 보니 가사가 퍽 쉽고, 간결하다.

그 노랫말 또한 따뜻하다. 과하지 않으나 은근한 미온이 전해져 오래 머물 듯한 등나무 꽃의 보랏빛처럼...


예술가적 감각이 뛰어난 이들에게 인기 있다는 보라색. 타색과 무난한 조화를 이루기엔 저만의 개성이 강해 다루기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색상. 날 향해 윙크하며 사랑스럽게 애교 떠는 이 보랏빛 요정들이 있어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이 마냥 아름다운 게 아닌지. 사랑스러운 그들의 존재에 눈이 떠져 감사하다. 그들을 돌아보고, 놓칠까 조바심 나는 이 순간이 짜릿하게 즐겨진다.


"이름도 모르는 보랏빛 꽃이 이처럼 많구나!" 새삼스럽다. 그들 모두를 이름으로 불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친근하게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면 더욱 환한 미소 지으며 내 눈과 코를 기쁘게 해줄 텐데...


한국관 달리 독일은 계절의 색감이 썩 다채롭거나 화려하지 않다. 가을 단풍도 붉게 타오르는 한국에 비해 오렌지를 머금은 은은한 갈빛이 주를 이루고, 샛노오란 개나리, 붉은 철쭉과 진달래 등 군락을 이루고 떼 지어 피어오르는 한국의 화려한 봄과  달리 이 곳의 봄꽃들은 군데군데 듬성듬성 피어오른다.  

유일하게 무리지어 너른 들판을 한 빛깔로 물들이는 유채꽃이 피어오르는 4월. 그 노란 물감색이 바랄 즈음 속삭임처럼 다가온 보랏빛 향기 가득한 5월.

6월은 어떤 색상으로 나를 유혹해주려나 기대와 설렘 가득 안고 은근하게, 중독성 있게 나를 자극해준 보랏빛 찬란했던 5월에게 안녕을 고한다!

내년에 또 찾아와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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